마음이 답답한 하루하루입니다. 매일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청와대와 국가는 폭력진압으로 그에 맞섭니다. 기차의 레일처럼 끝 모를 평행을 이루며 달리고 있습니다. 머슴이라고 스스로 자처했던 사람들과 머슴이 섬겨야 할 주인이 완전히 뒤바뀐 모습을 보며 원래부터 국가라는 제도에 의구심을 가졌던 나는 아나키즘을 깊이 고민해봅니다.

세상사와 상관없이 자연은 지금까지의 순환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그랬던 것처럼 6월 중순 들어 곳곳에 밤나무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그 기세가 7월 초까지 이여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아름다운 분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밤나무는 풍매화에요? 아님 충매화에요?"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밤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합니다. 참나무 종류들은 잘 알다시피 풍매화입니다. 바람의 힘으로 꽃가루받이를 하고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러다보니 꽃이 화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꽃과 암꽃이 한 나무에 따로 피는데 아래로 길게 늘어진 꽃자루에 수꽃이 피고 암꽃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꽃자루 위쪽에 아주 작게 핍니다. 벌과 나비를 유혹할 필요가 없으니 향기를 내뿜을 이유도 꿀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현란한 꽃잎을 만드는데 에너지를 쓸 필요는 더더욱 없지요.
 
그런데 밤나무는 꽃향기(?)가 아주 진할 뿐만 아니라 꿀이 많기도 합니다. 밤 꿀을 먹어본 적이 있는 분은 아시겠지요. 더군다나 노란색이 가미된 흰색의 꽃이 만발해 멀리서 보면 제법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합니다. 이게 뭐야? 풍매화라면 어떤 이유로 밤나무는 제법 예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하며 꿀까지 만들어 놓는 걸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밤나무는 풍매화라고 설명한 정보들이 여럿 있는 것을 보니 이 의문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누구 그럴듯한 해석 좀 해 주시길......

참 밤나무 꽃에서 풍기는 냄새를 향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역하다고 표현하거든요. 사람 수컷의 정액 냄새와 아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나무가 많은 동네에서는 과부가 살기 힘들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여성분들끼리는 밤나무 꽃 아래서 진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는군요.

▲ 밤꽃  © 은평시민신문
밤을 한자로 栗(율)이라고 합니다. 이는 西와 木이 합성된 글자입니다. 西의 모양이 열매가 매달리는 형상인데 열매가 아래로 드리우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형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쪽을 뜻하는 西는 ‘떨어져 나가다 갈리다’라는 의미가 있어 ‘밤송이 속에 열매가 2~3개로 나누어져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한국어 이름인 밤의 어원에 대해서는 씨를 뜻하는 種(종)이 붓의 고형으로 여기에서 ‘받〉발〉발암〉바암〉밤’으로 변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밤의 어원은 씨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구리(くり)’라고 한답니다. 구리는 ‘왔다’는 뜻의 래(來)자를 발음한 것인데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왔다’는 뜻이라고 해서인지 개선 축하식에는 밤을 쓴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chest net'라 합니다. 체스트넛은 단단한 통을 뜻하는데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가시밤송이 안에 들어 있는 열매라는 뜻 같습니다.

밤나무는 15m까지 자라는 참나무과의 나무로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습니다. 술처럼 다북하게 길게 늘어져 달리는 것은 수꽃의 꽃차례이고 암꽃은 수꽃의 꽃차례 바로 밑에 세 개씩 달리는데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밤나무는 씨앗을 심거나 접을 붙여서 기릅니다. 햇볕을 좋아하고 뿌리를 깊게 뻗습니다. 흙이 깊고 물이 잘 빠지는 양지바른 산기슭에서 잘 자랍니다. 어릴 때는 나무껍질이 매우 얇고 나무 속에 물기가 많아 겨울에 얼어 죽기 쉽답니다.

씨앗을 심은 지 7~10년은 있어야 밤이 달리지만 접을 붙이면 4~6년 만에 밤이 달리는데 삼사십 년이 지난 뒤에 가장 많이 달립니다. 500년까지 살 수 있는 장수하는 나무입니다.

사당이나 묘에 세우는 위패를 만드는 데는 꼭 밤나무를 씁니다. 그 이유가 그럴듯합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종자에서 싹을 틔워 내면서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밤나무는 그 반대로 종자의 껍질이 뿌리가 내려가고 줄기가 올라가는 그 경계 부근에 오래도록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밤나무는 자기가 나온 근본을 잊지 않는 즉 선조를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겨졌습니다. 제사 때 밤을 올려놓는 것은 밤을 돌아간 조상님의 음식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먼 길을 가거나 전쟁터에 나갈 때 밤을 식량삼아 가지고 간 것처럼 저승 가는 길의 식량으로 밤을 올리는 것입니다. 선사 시대 무덤에서 밤이 나온 사실이나 중국의 동방삭이 죽었다가 일 년 만에 살아오면서 말하기를 저승 가서는 밤만 먹고 살았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보아도 밤을 죽은 이의 음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밤은 자식과 부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혼례에도 밤이 꼭 등장합니다. 전통 혼례의 대례청에 있는 밤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혼례식이 끝나면 동네 여인들은 재빨리 밤을 집어 가곤 했답니다. 이런 관습은 신식 결혼식을 올리고도 시가 어른들께 폐백을 올리는 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폐백상에는 반드시 밤과 대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밤 생산의 중심지는 경기도 시흥과 과천 등이었습니다. 특히 과천은 고구려 때부터 이 이름으로 불렸는데 밤이 많이 나서 열매 과(果)자를 써서 과천이라 했다고 합니다.
 
밤나무가 얼마나 요긴한 나무였던지 성종 23년에 발간된 ‘속대전’을 보면 밤나무를 생산하는 농민은 부역에서 제외되었고 밤나무 목재를 귀히 여겨 밤나무 보호림을 지정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태종 7년에는 강변에 밤나무를 심도록 법령으로 정하고 있어 아직까지 한강 금강 낙동강 등 강가나 하천가에 남아 있는 좋은 밤나무 숲을 볼 수 있습니다. 경남 밀양의 밤나무 숲 금호 강변의 밤나무 숲 한강의 밤섬 남양주의 밤섬 등도 그런 연유의 지역입니다.

밤나무는 목재로도 많이 이용됩니다. 철도 침목은 거의 밤나무입니다. 재질이 단단하고 탄성이 커서 승차감이 좋습니다. 게다가 목재에 타닌 성분이 있어 잘 썩지 않으므로 다른 나무보다 수명이 길고 특별히 방부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타닌은 염료 및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데도 이용합니다.

참 약밤이라고 들어보셨지요? 토종밤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있으나 중국이 고향인 밤나무입니다. 예전에 평양의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많이 길러 평양밤으로 더 유명합니다. 고향을 이곳에 두신 분들은 밤 껍질이 홀랑 잘 벗겨졌고 깨물면 아주 달고 맛있어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고 회상하곤 합니다.

밤이 되면 밤나무 꽃향기가 더욱 진하게 잠자는 코를 자극합니다. 누구는 역하게 느낀다지만 청와대에서 풍기는 지린내보다는 백배 천배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오늘 밤도 깊어갑니다. 제발 헌법이 제대로 구현되는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어 봅니다. 

 
참고문헌

1. 강판권(2007) 나무열전 글항아리. 375쪽.
2. 김준민(2006) 들풀에서 줍는 과학 지성사. 302쪽.
3. 나무도감(2004) 나무도감 보리. 319쪽.
4. 박상진(2004)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김영사. 265쪽.
5. 이유미(199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나무 백 가지 현암사. 647쪽.
6. 이유미(2004)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지오북. 313쪽.
7. 임경빈(1991) 나무백과(1) 일지사. 357쪽.
8. 윤주복(2008) 나무해설도감 진선books. 350쪽.
9. 허북구 박석근 이일병(2004) 재미있는 우리나무 이름의 유래를 찾아서 중앙생활사.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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