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대륙 횡단 열차

‘4’자로 상징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던가. 400Km가 넘지 않으면 거리도 아니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려고 해도 400km쯤은 가줘야 하는 곳. 그보단 반경 400km쯤은 동네 마실 다니듯 휘젓고 다닌다는 통 큰 곳. -40도가 아니면 추위도 아니다. -10도쯤의 날씨엔 웃통 벗고 다니고-20도 정도 되어야 부채질하며 대략 -40도쯤은 되어야 뻬치이카에 불 때기 시작한다는 뜨거운 피를 가진 동네. 40도는 되어야 술이다. 적게는 40도에서 75도 그 독한 보드카를 생명의 물이라 부르며 병째로 들이키는 단단한 내장을 가진 아직도 잠자는 땅 시베리아.

우랄산맥 동편으로 캄차카 반도까지 러시아 땅의 2/3를 차지하고 화석연료와 목재 차고 넘치는 광물의 대부분을 품에 안고도 조용히 잠자는 그 땅 위에 나의 첫 발자국을 찍은 건 작년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는 총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를 타고 눈뜨면 지평선 보드카 한 잔에 눈감으면 백야(白夜)의 잔영과 함께 3박 4일을 달려 바이칼에 갔었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를 따라 어김없이 자작나무는 가녀린 흰 바탕의 군락이 되어 다시 나타났고 군데군데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강줄기는 시베리아의 태양을 반사시켜 그 빛으로 나는 아침 세수를 대신했었다.

▲ 황혼으로 가는 배  (바이칼 알혼섬)
시베리아가 내게 말했다


그때 나는 시베리아의 강물을 보며 사람의 길 마을과 마을의 소통이었던 강줄기를 꼭꼭 틀어막아 댐을 쌓고 주위를 온통 콘크리트로 도배질한 후 개발의 완성을 자축하는 우리의 게걸스러움을 보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간이라도 내어줄 듯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쳐대는 내 누이의 비굴함과 거기에 얹혀사는 이들을 비참하게 무릎 꿇리는 자본의 비정함을 두려워했었다.
 
그때 이미 나는 아마존과 더불어 세계 양대 허파라고 부르는 대자연이 있고 인류의 산업을 적어도 수백 년 동안 지탱시킬 수 있는 막대한 자원을 땅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자본의 위대함을 앞세워 요기(妖氣) 어린 손짓을 보내는 탐욕스런 떨거지들에게 조용히 훈계하는 시베리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베리아는 자연을 사는 모든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는 있으나 탐욕스런 너희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는 없다”는.

올해에는 어떤 훈계를 들을 수 있을까 자못 기대하며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른 게 지난 7월. 작년에 완수하지 못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나머지 구간 바이칼에서 모스크바까지를 거꾸로 타고 내려오기 위해서였다.

30여명쯤 되는 일행의 체크인에 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모스크바 호텔 측의 느긋함에 부아가 오르고 기껏 배정받은 방의 열쇠를 각 층마다 배치된 여직원(이분은 우리 시각엔 없어도 운영에 문제없는)이 쥐고 일일이 여닫아줄 때의 황당함이 있었지만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은 하지 않아-구전가요 백수가-”도 별일 없이 사는 듯한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정리해고에 앞서 월급을 반으로 줄이면서까지 일자리를 나누겠다고 선언한 노동자들을 헬기를 동원한 경찰력으로 무력화시키고 결국 살인으로 몰아넣는 자동차 회사가 있는 나라에서 온 우리들은 굳이 한 사람이면 충분한 일거리를 서넛이 나누어 갖는 그들의 고용 나눔을 술안주로 씹으며 러시아의 첫날 밤을 보냈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나

모스크바를 떠나 바이칼로 향하는 기차는 어느새 우랄산맥을 넘어 예카테린부르크와 노보시비리스크를 지난다. 기차를 타고 만 하루가 훨씬 지났으니 당연히 일용할 양식인 햇반과 컵라면 그리고 보드카에 은근히 취해 지평선 너머 지평선 끊임없는 지평선의 끝자락에 펼쳐진 자작나무 군락을 보며 군가를 흥얼댄다. “라스츠비탈리 야블리니 끌루쉬 빠쁘일리 뚜마니에 나드리 꼬이. 오 노래야 처녀의 노래야 날아라 저 빛나는 태양을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카츄사의 사랑을 전해다오”

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가장 많이 불렀다는 러시아 군가 카츄사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아리랑과 같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따위의 노래를 군가로 알았던 나에게 카츄사의 가사는 충격이다.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카츄사의 사랑을 전해다오” 이 구절이 어떻게 군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세태 비판은 고사하고 허무조차 금지곡의 명분이 되었던 시절에 그 노래들을 부르며 자랐던 가수에게 러시아 군가 카츄사는 이해하기 참 난감한 노래였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

작년에 갔던 하바로프스크의 전쟁 박물관에는 총 맞아 쓰러진 통신병의 미니어쳐가 전시되어있고 우크라이나역 광장에는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상이 있다.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 시청광장에는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바이칼 호수 안 최대의 섬 알혼에도 전장에 나가는 아들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가족이 조각되어있다.
 
용산 전쟁기념관이나 일본 야스쿠니 옆의 류슈칸(일본 전쟁 기념관)엔 고대 적부터 사용된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전쟁기념관은 무기 전시장이 되어선 안 된다. 굳이 전쟁을 기념하려면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가보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가”가 기록되어야 한다.

조용히 갈 길을 가라고

횡단열차 안에서 보드카 병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엔 기타를 꺼내어 고 문익환 목사의 시 ‘비무장 지대’를 다 같이 불렀다.

“너희는 백두산까지 우리는 한라산까지 철조망 돌돌돌 밀어라 온 누리 비무장 지대로”

기차 안 3박4일 중 만취한 어느 날은 이 노래를 다시 부르다가 울컥 눈물이 나온 적도 있다. 평화로 가는 긴 여정에서 부득이 전사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 아무르 강변에 누워있는 김 알렉산드리아 하바롭스크의 작은 집필실에서 낙동강을 썼던 조명희 타슈켄트의 고려극장 문지기 홍범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러시아 국립묘지)132번 벽면묘지에 잠든 백추 김규면 그리고 37년 강제이주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의탁했던 17만2천 명의 조선인들. 내가 타고 있는 이 열차를 통해 목숨이 오고간 씨·날줄로 엮인 거대한 역사 앞에 떨군 한 방울 눈물이 그 무슨 헌사가 되었을까마는.

다시 시끄러운 나의 세상으로 왔다. 통일부는 여전히 반통일적이고 정리해고의 칼날은 언제나 번뜩인다. 제주 강정의 구럼비바위는 곧 콘크리트로 덮을 셈이다. 시꺼먼 돈을 받은 놈들은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는데 사람의 정리를 생각해서 돈을 준 교육감은 보석 신청도 거부 당한다. 을사늑약보다 더한 한미 FTA의 매국 행위는 언론에 의해 애국이 되고 현직 대통령이 저지른 내곡동 땅 투기는 이름처럼 깊숙한 골짜기가 되어 묻혀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시베리아는 별것인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별것 많은 세상 좌고우면 하지 말고 조용히 나의 길을 가라고 훈계한다. 그러니 세상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아 지지고 볶아라.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마지막 구간 부산서 원산 거쳐 연해주 가는 꿈꾸면서 잠이나 한잠 잘란다.

(사)희망래일(이사장 한완상)과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은 1월20일부터 27일까지 바이칼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7박8일의 시베리아 대륙 횡단 여행을 진행합니다.
문의 010-9024-1518 희망래일 유영주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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