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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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분들이 있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로서의 나’는 지금의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며칠 전 읽은 기사의 제목이 떠올랐다. “치료 늦어진 암 환자 사망…” 너무 안타까우면서도 너무 답답했다. 속히 치료를 받고자 애태우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상황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투약이 며칠 늦어져 임종하실 정도의 전신적인 상태에 놓인 환자라면 애초에 항암치료가 아니라 완화치료가 권유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설명들이 진작에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지금의 상황이 답답해졌다.

나는 항암치료를 오랫동안 열심히 받아왔던 친구에게, 이제는 더 이상 항암치료가 의미가 없으니 마지막을 준비하자는 얘기를 전한 적이 있다. 솔직히 그 얘기는 내가 친구에게 전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친구의 주치의, 몇 년 동안의 항암치료를 진행해왔던 주치의가 전했어야 할 이야기였다. 

주치의는 사실 그 얘기를 전했다. 상급종합병원의 빽빽한 외래 진료 스케줄 틈바구니에서, 긴 짬도 내지 못한 상태로, 항암치료가 크게 효과가 없으니 이제는 더 이상 여기를 올 필요가 없고 앞으로는 호스피스 쪽으로 진료과를 옮기라는 얘기가 전달되었다. 그저 전달되었다. 나의 친구는 그 이야기가 죽음이 다가왔다는 얘기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고,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내 친구가 너무 이해되었다.

나는 그 주치의도 이해되었다. 몇 년을 자신을 믿고 열심히 항암치료를 해 온 환자에게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고 얘기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환자의 희망을 저버리고 환자의 노력을 배신하는 것 같은 스스로의 모습에 무너지느니, 차라리 감정을 무디게 만들어야만 아직 남아 있는 몇 십 명의 외래 환자들, 또 다른 암 환자들을 진료하는 게 가능했으리라.

이미지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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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입원해 있던 요양병원을 찾아가 ‘임박한 너의 죽음’을 전하기 전날 나는 방바닥을 뒹굴면서 울었다. “왜 내가 해야 해? 누가 이런 얘기가 하고 싶어?” 누구라도 이런 이야기는 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그 얘기를 했기 때문에, 친구는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기로 다짐했고, 여러 다른 친구들과 더불어 살아있는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고,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은 채 호스피스 병동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지금 한국의 의료 수가는 행위별 수가 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행위별 수가란 어떤 행위를 하면 할수록 매출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수술을 하면 할수록, 투약을 하면 할수록, 처치를 하면 할수록 매출이 오르는 이 체계에서는, 무슨 치료든 시작하는 것보다 그만두는 게 더 어렵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환자를 배신하는 것만 같은 ‘항암치료 중단’임에야 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이 꼭 필요한 치료인지 아닌지 환자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은 사치가 되고, 환자에게 사망을 선고하는 일은 가슴 아파 자꾸 피하고만 싶은 일이 되니, 결국 이런 얘기들이 별다른 의논 없이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그저 전달되곤 하는 것이다.

나는 의대 증원이 필요하냐 아니냐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의사가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사가 늘어나야 하는가. 왜 늘어나야 하는가.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리는 것이 더 많은 숫자의 의사를 통한 더 많은 투약, 더 많은 처치, 더 많은 수술을 의미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이 투약이 꼭 필요한지 아닌지, 저 처치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지를 고민하고, 이 환자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지를 파악하여 앞으로의 치료 방향을 환자와 가족들과 함께 결정하기 위해, 그런 대화와 소통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의사가 필요하다. 더 많은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의사가 늘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제공하고 있는 의료가 과연 적정한 정도인지를 고민하기 위해. 최대한의 의료가 아닌 최선의 의료를 같이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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