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따뜻한 햇살, 강정애씨의 배움과 희망의 이야기

흔히 젊음을 청춘에 비유한다. 인생의 젊은 나이,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과 같다는 의미다. 젊음이 봄이라면 늙음은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는 그 어디쯤일까?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잎을 떨구는 과정을 인생에 비유하다 보니 노년의 삶은 겨울 그 어디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봄에 피는 꽃도 있고 가을에 피는 꽃도 있듯이 노년의 삶을 활짝 꽃피우는 이들이 있다. 건강하고 활기찬 노년의 삶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만나보자. 

배고픔이 일상다반사였던 시절

아침에는 김치죽, 저녁에는 시래기죽으로 배고픔을 달랬다. 참혹했던 한국전쟁이 끝난 뒤라 가난과 배고픔은 그렇게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누구라도 만나면 첫 인사가 밥은 먹었느냐는 질문을 던지던 시절이었다. 

강정애씨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뒤인 1955년 충남 부여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웠던 시절, 가난한 집안의 장녀의 삶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하지만 강정애씨로부터 직접 들은 당시 상황은 짐작보다도 훨씬 더 어려웠다. 하긴 겪어보지도 않은 일을 ‘대충 짐작’이라는 말로 퉁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일이리라!

“밀을 맷돌에 갈아서 죽을 쑤는데. 그 때는 왜 그런지 배추도 지금같은 통배추가 아녀. 질기고 시퍼렇고 그래. 옛날에는 양념 같은 것도 풍부하지 않았잖아. 그 놈을 갖다 이제 죽을 쒀서 먹고 점심에는 동치미에다 고구마 그런거 해서 먹었지. 저녁에는 시래기 죽 이런거 먹었고.”

배움으로 제2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강정애 씨
배움으로 제2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강정애 씨

밀, 시래기, 배추, 고구마 등 지금이야 건강을 생각하면서 먹을 식재료들이 그 때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재료였다. 쌀구경은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절, 배고픔의 서러움이 큰 시절이었다. 

“엿 만드는 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강냉이로 엿을 고아. 거기서 나오는 찌꺼기, 동물이나 먹어야 되는 건데, 지금은 동물도 안 먹지.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걸 사다가 당원이라는 게 있어. 설탕 나오기 전인데 하얗고 엄청 달아. 엿밥 가져와서 거칠한 거 채로 내리고 그거를 이 설탕물(당원)에 타서 먹으면서 끼니를 떼우고 살았지.”

부여는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고 한다. 기껏 지은 농사를 비 때문에 망쳐버려 이렇다 할 수확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12살 때까지는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시면 쌀을 한 두 번 밖에 못가져오셨던 같아. 그 때 논 옆에 둠벙이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니까 둠벙 물이 넘쳐버려 논으로 가버리고 벼가 물 속에 잠기니까 하나도 못 먹는 거지.”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건 경지정리사업이 진행되고 나서다. 경지정리사업으로 농경지를 다듬고 배수, 관개 등의 설비를 갖추고 나니 농사 실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기성회비 내지 못해 멈춰야 했던 학업

가난은 배고픔 뿐만 아니라 공부할 기회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8살이 되어 학교에 갔지만 겨우 1년을 다니고 더 다닐 수 없었다. 

“기성회비 못 가져가면 선생님들이 앞에다 불러다 세워놓고 손바닥도 때리고 종아리도 때리고 친구들 앞에서 그랬지. 어린 나이였지만 자존심이 엄청 상해서 엄마한테 학교가기 싫다고 했어. 차마 학교에서 맞은 얘기는 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안 맞으니까 그냥 동생들이나 돌보겠다고 했지.”

기성회비 내는 일 조차 힘든 형편에 밑의 동생들도 생각해야 했다. 부모님이 마음 아파할까봐 차마 맞았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벌써 60년도 넘은 일이지만 강정애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물을 닦았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그는 어린 나이에도 그 마음을 접으며 가족들을 생각해야만 했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다보니 가슴에 항상 맺힌게 있어서 누구 앞에 서는 것도 못하겠고. 자신감이 없으니까. 사회에 나와 보니 배운 사람하고 안 배운 사람하고 차원이 다르더라고.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괜히 얘기하다가 내가 안 배운 거 들통나는구나 싶어서 항상 숨기고 살았지.”

갓 스물을 넘겼을 무렵 그는 초등학교 친구였던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을 했다. 깨가 쏟아질 신혼살림을 남편은 서울에서 그는 부여에서 보내다 2년여가 지난 즈음 서울로 올라왔다. 강정애씨는 3남매를 낳아 키우는 동안 시부모님 봉양과 시동생 돌봄도 맡아서 했다. 서울에서만 12번의 이사, 어려운 살림살이를 짐작케 한다. 

“막내 시동생이 5학년 때 처음 만났는데 지금은 같이 늙어간다고 만나면 웃어요.”

오십여년의 세월이 쏜살같다. 그러는 사이 그의 머리에는 어느새 흰눈이 내려앉고 어느새 아이들은 훌쩍 커버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늦은 학습의 꽃, 강정애 씨의 노년 교육 여정

배움으로 제2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강정애 씨
배움으로 제2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강정애 씨

 

강정애씨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3년 전, 늦은 공부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딸이 여기(은평구평생학습관) 접수를 해줬어. 그래서 가보겠다고 했지. 그런데 여기 오는 길에 자꾸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거야. 어디가냐고 묻는데 그 때마다 친구 만난다고 둘러대고 (아는 사람)안 마주치려고 했지.”

공부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강정애씨의 삶은 180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글을 공부하고 (문화집단) 너느와 함께 댄스를 배우고 연극을 하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60년 동안 눌려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감춰져있던 그녀의 ‘또 다른 재능’을 만날 수 있었다. 

“연극을 하라는데 한글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대사를 외워서 하냐고. 그래도 선생님들이 걱정하지 말고 하라고 해. 근데 연극을 하고 나니까 진짜 자신감이 조금 생기기 시작하더라고. 자신감이 드니까 여기서 공부하는 게 하나도 창피하지 않아. 예전에 이만저만해서 학교를 못 다녔는데 이렇게 좋은 데가 있어서 공부를 한다고 이제는 주변에 자신있게 말하지.”

강정애씨의 제2의 인생은 공부하는 삶이 가져다 주었다. 원래도 밝은 모습이었지만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아쉬움과 불안감을 공부로 극복하면서 한층 더 밝아진 모습을 갖게 됐다. 그 중에서도 라인댄스를 추면서 갖게 된 경험은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원래 옷도 검은색 이런 거만 입었어. 사람들 눈에 잘 안띄게 말야. 그런데 선생님이 라인댄스 할 때 입을 반짝이 옷을 사라는 거야.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하나 사서 입고 갔더니 이 정도로는 안되는 거야. 그냥 과감하게 가자고 생각하고 진짜 화려한 걸 사 입었지. 주변 사람들이 놀래서 한마디씩 하는 거야. 그러면 내가 그래. 나처럼 이렇게 댄스 같은 거 해보라고. 그러면 변화가 있다고 말야.”

반짝이 옷 얘기를 하는 그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게 만난 배움이지만 그동안의 간절한 목마름 때문이었을까? 그는 한방울도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듯 배움에 임하고 있다. 

 

“공부하다 보면 바빠. 월요일은 과학·영어, 화요일은 국어, 수요일은 사회, 목요일은 수학·미술을 해. 전에 허리를 다친 일이 있어서 책상에 앉아있기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가면 책상에 앉기 싫더라고. 항상 책하고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집에 가면 휙 가방 던져두고 다음날은 챙겨오기 바빠.”

영락없이 공부하는 학생의 모습이다. 늘 뭔가를 배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기에 보람도 크다. 앞으로의 꿈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그는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담은 답을 내놓는다. 

“건강만 허락해 준다면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 그리고 짧은 글 말고 멋진 긴 문장으로 편지를 써보고 싶은 게 꿈이지. 글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 알려드리는 봉사도 하고 싶고 그래.”

늘 주변사람들에게 따뜻한 품을 내어주며 활짝 웃는 강정애씨에게 더 멋진 나날들이 펼쳐지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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