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현종이 머물던 신혈사, 고려 금성신앙이 자리 잡은 금성당

삼각산 신혈사에서 출발한 고려 현종의 자취가 나주를 거쳐 구파발 금성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 서북권에 위치한 은평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고려의 역사가 담겨있는 것이다.

KBS 2TV ‘고려거란전쟁’ 공식 포스터. 출처=KBS 2TV ‘고려거란전쟁’ 홈페이지
KBS 2TV ‘고려거란전쟁’ 공식 포스터. 출처=KBS 2TV ‘고려거란전쟁’ 홈페이지

 

지금 한창 방영 중인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당대 최강국 거란과의 26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의 번영과 동아시아의 평화시대를 이룩한 고려 황제 현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드라마 초반에는 왕위에 오르기 전의 현종, 즉 대량원군이 삼각산 신혈사에 머무는 장면이 나온다. 삼각산은 북한산을 의미하고 신혈사는 진관내동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는 진관사 서북쪽에 ‘신혈사고지’라고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등장하는 신혈사
대동여지도에 등장하는 신혈사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 왕건의 친손녀이며 고려 5대 국왕 경종의 계비다. 경종이 죽은 뒤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 즉 숙부인 왕욱과 사통해 현종을 낳았다. 당시 국왕인 성종은 왕욱을 지금의 경남 사천으로 유배 보냈다. 어머니 헌정왕후는 현종을 낳고 곧 죽어 현종은 출생부터 외로운 상황이었다.

현종의 이모인 천추태후는 그의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외족인 김치양과 사통해 아들을 낳고 목종에 이어 왕위를 잇게 할 요량으로 조카인 대량원군을 출가시켜 신혈사로 보내 버린다.

대량원군이 이곳 신혈사에 몸을 의탁한 뒤 왕위에 올랐으니 신혈사와 인근 사찰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다. 삼각산 승가굴의 승가대사상에 있는 광배는 현종이 즉위 후 보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각산은 현종의 고난 장소이자 정변의 근원지로 후계자들에게는 성지가 되었고 당시 삼천사 주지는 왕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대량원군은 15세를 맞은 목종 9년에 삼각산(북한산)의 신혈사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그를 ‘신혈소군’이라 불렀다. 응천태후가 누차 사람을 보내 대량원군을 해치려 했지만 절의 노승이 방에 굴을 파서 대량원군을 숨기고 그 위에 평상을 두어 가렸다. 하루는 내인을 보내 독약이 섞인 술과 떡을 대량원군에게 먹이려 했다. 절의 중이 소군을 굴속에 숨겨놓고 거짓말을 했다. “소군이 산중에 놀러 나갔는데 도대체 간 곳을 모르겠소,” 내인이 술과 떡을 놓고 돌아간 후 그것을 뜰에 흩자 까마귀와 참새가 모여들어 먹고는 곧 죽었다고 한다. <천추태후 역사 그대로, 김창현 지음>

거란은 고려가 여진과 송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거란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에 위기 의식을 느끼고 고려를 침략했다. 현종이 즉위한 다음 해의 일이다. 현종은 거란의 침략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1011년 12월 말 겨우 5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개경을 빠져나왔다. 파주를 지날 무렵 현종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목종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 이들이었다. 삼각산과 도봉산의 북쪽에 위치한 창화현에 이르렀을 때는 대량원군 시절 어울리던 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현종은 천안, 공주를 거쳐 나주를 향했다.

KBS 역사저널 그날, 방송 화면 캡쳐
KBS 역사저널 그날, 방송 화면 캡쳐

현종은 충주와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지역으로 가 상주, 안동 등에 머무는 대신 공주 방면을 선택해 나주까지 내려갔다. 나주는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개척한 곳이고 제2대 혜종의 외가로 고려 왕실의 주요 기반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후백제 지역의 유민들은 고려 왕실에 원한이 있었다.

현종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주로 향한 이유는 목종과 관련이 있다. 경상도로 가려면 충주를 거쳐야 하는데 이 곳은 목종의 지지 기반으로 현종에 대한 원망이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나주로 방향을 잡았다. 현종의 지지기반은 그의 부친이 생활했던 사천, 부친의 외가인 합천, 현종의 즉위를 지지한 경주 등 경상도 지역이었지만 충주를 지나가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던 것이다.

거란이 물러가지 시작했지만 이를 알지 못한 현종은 나주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이곳에서 9일간 머무른 뒤 나주를 떠나 북으로 향했다.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나주에서의 환대를 잊지 않았다. 9일 동안 편하게 머물게 한 보답으로 나주에서도 팔관회가 열리도록 허락했다.

 

구파발 금성당 (사진 : 정민구 기자)
구파발 금성당 (사진 : 정민구 기자)

1018년 현종은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가장 중요한 지역에 8목 4도호부를 두었는데 이때 나주가 8목 중 하나가 됐다. 나주의 옛 지명은 금성으로 고려 태조 때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다. 이후 고려 충렬왕 때 나주 금성산의 금성산신은 금성대왕으로 일컬어지면서 정녕공으로 봉해졌다. 금성신앙은 서해를 따라 이동하며 한양으로 이동해 들(망원) 금성당, 각심절(월계동) 금성당, 구파발 금성당에 자리 잡았으나 노들과 각심절 금성당은 재개발 등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구파발 금성당만이 고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은평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