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 언스플래쉬
이미지 : 언스플래쉬

25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반가운 전화가 왔다. 부산에서 유명한 사립 초등학교였다.  부유한 자재들만 제비뽑기로 간다는 초등학교였으나 그나마 유일하게 뇌병변 장애를 가진 나에게 입학 기회를 준 학교이기도 했다. 6년 동안 같은 반이 아니었는데도 유일하게 대학 졸업식에 나에게 꽃다발도 건네준 친구였다. 

90년대 후반 동창 찾기 서비스로 모임을 가지다가 모두 흩어졌는데 그 친구가 다시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은 모두 합해봐야 총 3반으로 180명을 넘지 않았다. 나는 기억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지만 학교 복도에서 단 한 번이라도 나를 마주친 아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나를 기억했다. 한시도 교실에서 가만있지 않고 목발을 휘저으며 엄청 돌아다니는 작은 아이로 모두 나를 떠올렸다.

나는 반 친구들과 추억이 별로 없다. 한창 뛰어놀 4학년 때부터 나는 반 아이들과 소풍을 가지 않았다. 저학년일 때는 행동 범위가 넓지 않아서 그나마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혼자서 소풍지를 탐험해도 괜찮았으나 학년이 오를수록 활동 능력과 범위의 발달이 차이가 났다. 

반 대항 줄다리기는 친구들 사이에 넘어질까 근처도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선생님들이 내가 소풍 가는 것을 꺼려 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6학년 졸업반 수학여행에서 교감 선생님께서 직접 나를 업고 경주 토함산을 오를 정도였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내 소풍날은 아침 일찍부터 치료실로 출근하는 날이 되었다.

이미지 : 언스플래쉬
이미지 : 언스플래쉬

학교생활 때문에 턱없이 부족한 치료 시간을 보충하는 날이었다. 1등으로 치료실의 불을 켜고 몇 시간씩 울다가 웃다가 오전에 치료를 마치면 부모님은 한가하기 그지없는 동래 동물원에서 나에게 커다란 솜사탕을 안겨 주셨다. 평소 주말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로 가득 차서 내 목발이 등장할 여유도 없을뿐더러 내가 등장하면 바이러스라도 퍼질 듯이 사람들이 나를 피했는데 평일 오전 동물원은 그 유명한 코끼리도 공작새도 1 대 1로 실컷 만날 수 있었다. 

서럽거나 슬프지 않았다. 소풍 다음 날에 만난 친구들은 내 앞에서는 소풍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닿은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단체 채팅방이 만들어지니 동창들의 추억들이 몽실몽실 올라오는데 문득 나는 무척 궁금했다. 친구들이 소풍 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놀았는지 그때도 지금도 궁금하기만 했다. 

지난 12년 학령기 동안 나는 비장애인과 계속 같이 교육받고 공부했지만 그래서 30년이 지났어도 나를 찾아 주는 비장애인 친구도 있고 아주 잘 커서 훨씬 얌전해졌다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친구들 사이사이에서 신나게 뛰어놀면서 그들의 놀이를 함께 배운 경험은 별로 없다. 장애인으로서 살면서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또래 문화 소외였다. 관계의 차별이었다.

시간은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장애인 학생을 소풍과 같은 체험학습 등에서 배제하는 것은 여전히 비일 비재하고 동네 학교 현장에서 특수학교나 가라는 이야기를 마치 배려인 양 당당하게 말한다.  

요즘에서야 장애인 아동들을 위한 ‘무장애 놀이터’, ‘통합 놀이터’란 이름으로 놀이터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휠체어 이용자가 탈 수 있는 그네도 최근까지 불법이었다가 행정부가 법적 근거를 겨우 만들었다. 우리 은평구에는 대중들에게 완전히 개방된 무장애 놀이터나 통합 놀이터는 없다.

서울의 어느 자치구보다 먼저 장애 아동들의 또래 문화, 놀 수 있는 권리를 생각해서 서부장애인 복지관 안에 아이마루 놀이터를 만들었지만 그곳에서 마저도 동네의, 학교의 비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 수는 없다. 

느리지만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신나게 놀고 즐길 수 있는 권리를 각성하고 다른 비장애인처럼 해외 체험학습까지도 지원하는 것이 늘어나고 있지만 항상 장애인 인권을 위해 앞서간다는 늘 자랑해왔던 은평구에 비장애인 어린이들과 장애인 어린이들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는 놀이터 하나 아직 없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지난 여름 개장한 은평구 물놀이터
지난 여름 개장한 은평구 물놀이터

올해 여름 구산동 마을공원 물놀이형 어린이 놀이터 조성 공사를 할 때조차도 장애인을 위한 고려는 많이 부족했다. 구산동 주민들이 모두 모이는 공원 광장에서 장애인 화장실도 찾기 어렵고 같이 물놀이를 즐기는 다양한 동네 아이들을 얼굴을 맞댈 기회도 드물었다. 

그래도 곁에 아이들은 모두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어렵사리 보물 찾기라도 재미나게 함께했던, 새로운 8비트 게임이라도 어깨동무 너머로 격파했던 장애인 친구를 20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만나자고 챙겨주면서 생일 파티 때 초대하고 결혼식에도 부르는 또래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은평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