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 오후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7회 한국 여성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 5일 오후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7회 한국 여성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최근 몇 달간 뉴스만 틀면 선거, 코로나 이야기로 들썩였다. 일정 기간 동안은 올림픽, 화재, 전쟁 등이 가미되었다. 선거에서도 정치인의 여자들과 올림픽 여자선수, 여성가족부가 문제라 했다. 그 문제의식도 다양했다. “여자는 이래서 안 된다, 여자는 정치하면 안 된다”에서 시작해 어떤 이의 어떤 오류, 잘못이 그쪽 계통 모든 이의 문제로 취급된다. 

드라마 ‘소년심판’에는 ‘소년범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까칠한 판사가 등장한다. 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내 기준에서 판사의 그 말에 적잖게 당황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는 판사의 말을 내내 머릿속에 놓고서 드라마를 시청했다. 사람을 적어도 이성적으로는 ‘혐오, 멸시, 증오’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나의 기준에서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교화시켜야 하는 거 아닐까, 그게 사회적 역할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본 그 드라마에서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것은 아무리 범죄 배경이 안타깝더라도, 그 소년범을 무조건적 용서하기 보다는 단호한 태도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무조건적인 봐주기를 하다가는 큰 범죄를 행하는 성인가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가해행위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는 것이 회피하고 도망 다니는 것보다 낫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가 겪은 피해를 알아야 하고 자신의 가해행위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것이 가해자 재발방지 교육이며 그것이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회복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피해자는 어디엔가 자신이 겪은 피해경험을 말하고, 도움을 청한다. 가해자가 무서워서 혹은 두려워서 자신이 안전하면서 도움 받을 방법을 찾으려 한다. 신고 사실을 알면 가해자가 더 화내고 보복할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천천히 헤어지고, 피해가 중단되길 바라며 가해자에게 웃음의 이모티콘을 날린다. 

“그 때 싫다고 말했어야지, 불편하다고 말했으면 되잖아”라는 말은 그것을 단호하게 말할 수 없는 어떤 관계나 상황 등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미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자신이 모자라서 그런 일이 생겼다, 상대방이 내 잘못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나 보복을 걱정하는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단호하게 분명하게 거절하기 어렵다. 

이미지 : 픽사베이
이미지 : 픽사베이

긍휼한 마음으로 상대방과 자신을 알아가는 것, 공감은 중요하다. 내가 옳다고 상대방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고쳐놓겠다며 행하는 훈육과 통제가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이 자라온 환경이 안타깝고 불쌍하고 이해되니까, 내가 보살핀다는 마음과 돌봄이 무조건적 희생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많은 슈퍼우먼들을 만들기도 한다. 집안에서도 일하고 집밖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은 일·가정 양립이라는 2교대 노동을 수행한다. 둘 다 어느 정도 잘해야 한다는 슈퍼우먼 되기의 기대가 있다. 

이와 달리 1940년 태어난 원더우먼은 여자들이 사는 세계에서 볼 때 인간들 중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의 부정의를 혼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비서’로 일하며 원더우먼이라는 투잡을 뛴다. 영화 속에서 아직도 뛰고 있다. 원더우먼은 ‘가해자를 혐오한다’. 그래서 성추행하는 회장, 성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재판하는 판사를 혼내주기도 한다. 

그래도 내게 남는 찜찜함은 ‘혐오’다. 누가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 혐오한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걸 성인이 미성년, 가해자에게 혼내는 방식이 훈육을 빙자한 또 다른 폭력이 될까봐 아슬아슬한 지점이다. 존재 자체를 혐오, 멸시하는가 혹은 그의 어떤 행적, 행위를 멸시하는가를 구별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성범죄자의 정보를 공개하는 제도가 개인정보자기결정권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지만, 사회적 공익과 효과들, 즉 사람들의 공동체 스스로 여러 방식의 예방과 대비를 하고, 가해 당사자도 조심하고 긴장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실제 그런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무시하고 혐오하기보다 피해자, 가해자가 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점검하고 ‘돌보’는 것은 슈퍼우먼이 할 일이 아니다. 가해자만 일상으로가 아니라, 피해자와 주변인들도 일상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은 여자들이 슈퍼우먼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사회공동체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슈퍼우먼이 되길 바라거나 원더우먼에게 모든 걸 해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멈춰야 한다. 

1927년에는 여성들이 스스로 해방하기 위해 항일운동단체 신간회의 자매조직인 근우회를 결성했다. 평등한 교육과 결혼, 이혼의 자유, 농촌여성과 경제적 평등, 여성과 소년노동자의 안전한 노동을 요구했다. 1945년에도 젊은 아기 엄마, 할머니, 중년여성과 단발머리 여학생이 모여 경제적 자주성 획득과 일제 잔재 제거를 외쳤다. 해방과 독재타도, 민주화에 함께 한 여성들 중 성고문과 성희롱, 성폭력, ‘전쟁군위안부’ 피해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혼을 여러 번 한 여자라 정치인 자격이 없다고 탈락하고, 정치인이라 이혼할 수 없다는 쇼윈도우 부부들도 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권한은 스스로에게 있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평등하지 않을 때도 많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권한이 없을 때도 많다. 

손가락이 아닌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는 말처럼 청소년 게임셧다운제와 여혐, 남혐 논란을 앞세운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에서도 폐지와 유지라는 손가락들보다 달에 집중해 보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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