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나는 시집 한 권을 낸 바 있는 시인이다. 그리고 지금도 책방 영업을 하는 틈틈이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시를 쓰고 있다. 수천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서점에 있으면 가뭇없이 시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그것을 낚아채듯 붙잡아 모니터에 언어의 이미지를 옮기는 것이다. 책장과 서가에 가득 꽂힌 책들을 ‘멍때리며’ 바라보고 있노라면 책 안에 갇힌 텍스트들이 나비와 벌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듯한 환영이 보이기도 한다. 그 기분이 썩 괜찮다.  

지금의 나처럼 시인 중에는 책방을 운영했던 이들이 제법 있다. 특유의 모놀로그적 화법과 반어의 미학을 고안해낸 김이듬 시인은 고양시 대화동에서 ‘책방이듬’이라는 서점을 하고 있고, 연극적 상상력을 시에 대입한 유희경 시인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시집 전문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따뜻한 품성을 가진 손세실리아 시인은 제주도에 정착해 ‘시인의 집’이라는 북카페를 운영중이다.

다들 어려운 시기에 적자를 메워가면서 책에 대한 일종의 헌신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로 시선을 돌려보면 시인부락 동인으로 유명한 오장환 시인이 서울시 낙원동에서 ‘남만서점’을 운영한 바 있는데, 그 서점을 승계해서 ‘마리서사’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독특한 문화를 가진 책방을 만들어낸 이가 시인 박인환이다. 마리서사는 해방직후 서울에 모여든 문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리서사 재연 모습 (박인환 문학관)
마리서사 재연 모습 (박인환 문학관)

1926년생인 박인환은 여러 면에서 참 인상적인 시인이다. 열아홉에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무작정 서울에 와서는 서울의 중심부 종로에 서점 마리서사를 연 이력부터가 비상하다. 거기서 그는 김광균, 이한직, 김수영, 김경린, 오장환 등과 친교를 맺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처음부터, 지금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처럼 낭만주의적 감성이 만연한 시를 썼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민중적 계급의식에 입각한 좌익 계열의 시를 쓰다가 일제의 경찰이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색출과 검거에 나서자 일대 시적 전환을 모색하더니 이념을 버리고 모더니즘에 입각한 낭만주의자로의 변신을 꾀했다고 한다. 

마리서사 재연 모습 (박인환 문학관)
마리서사 재연 모습 (박인환 문학관)

시인 박인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현재 한국현대시의 종조로 받들어지다시피 하는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박인환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지만 둘은 말을 트고 지내는 친구 사이였다. 마리서사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외국 시인들의 시집이나 철학 원서 등이 많았고 영어를 해독할 수 있었던 김수영은 그곳을 드나들며 박인환과 자연스레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김수영이 시인으로서 처음 시를 발표한 것은 1946년 3월의 일인데, <예술부락>이라는 잡지를 통해서였다. 김수영은 처녀작 「묘정의 노래」가 실린 그 문학지를 박인환에게 가지고 가서 보여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만 박인환에게 모욕적인 혹평을 듣고 만다. 이것이 김수영에게는 상처가 되었는지, 김수영은 자신의 시적 이력에서 「묘정의 노래」를 삭제한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사실 「묘정의 노래」는 1940년대의 관점으로 보아도 지나치게 관념적인 한자어가 많이 쓰이고 영탄적인 문투 일색이어서 낡아 보인다. 박인환의 혹평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후 모더니스트로 변신한 박인환이 <신시론> 동인을 결성하고 1집을 펴낼 때 김수영이 제외되는데, 김수영은 이때도 박인환에게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이를 눈치 챘는지, 박인환은 <신시론> 동인지 2집에 김수영을 끼워준다. 

박인환은 1956년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하는데, 그에 대한 애증의 골이 깊었던 김수영은 박인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수영은 훗날 몇 편의 산문과 시를 통해 박인환을 회고하는데, 「박인환」이라는 제목의 산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애증의 정도를 잘 알 수 있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의 비석을 제막할 때는 망우리 산소에 나간 기억이 있다. (중략)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박인환 문학관
박인환 문학관

박인환이 심장마비로 죽은 날짜가 참 공교롭다. 1956년 3월 20일, 그는 사흘간의 폭음 끝에 심장마비로 급서하는데, 평소 시인 이상을 흠모했던 그는 3월 17일 이상의 기일을 기념하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연사흘 폭음을 이어가다가 결국 생을 마친 것이다. 그런데, 박인환이 3월 17일이라고 알고 있던 이상의 기일은 정작 한 달 뒤인 4월 17일이었던 것. 이 사소한 착각이 개성 넘치는 한 시인의 삶을 허무하게 끝내버린 것인데, 이 또한 시가 부리는 신묘한 장난이 아닐지. 

박인환은 오래 전에 떠났지만 그가 운영했던 책방 마리서사의 자취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거기서 여러 시인들에 의해 몇 줄기 영감으로 피어나 전파된 한국 현대시의 어떤 경향은 김수영을 메신저로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롱 도스또옙스끼도 마리서사처럼 그렇게 문학적인 내러티브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 되길 원한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절치부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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