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오지혜 님이 기증해 주신 책들
영화배우 오지혜 님이 기증해 주신 책들

헌책방은 말 그대로 헌책, 중고책을 판매하는 곳이다. 그런데 ‘상품’으로서의 헌책은 새책과는 달리 공급의 체계가 일정하지도 않고 안정적이지도 않다. 헌책은 누군가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책을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어떤 식으로든 ‘처분’할 때 발생하는데, 그 동기나 계기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의적이어서 이를 두고 그 누구도 안정적인 공급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고책 시장에서의 ‘공급’은 “요구나 필요에 따라 물품 따위를 제공한는 것”이라는 뜻의 원뜻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 정도가 더 맞을 것이다. 

이처럼 비균질적인 공급의 특성 때문에 헌책방들은 소비자에게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의 ‘재고’를 언제나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일반 서점은 출판사와 위탁판매 계약을 맺고 출판사들이 펴내는 책을 일정하게 공급받기 때문에 항상 안정적인 재고를 확보해 놓을 수 있다. 책이 판매되면 출판사에 전화해서 주문을 넣으면 물류센터에서 전산으로 처리되어 바로 배송이 되기 때문에 금세 빈 재고가 채워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베스트셀러 같은 경우엔 서점마다 수십 권씩 확보해놓고 책이 팔릴 때마다 그 빈 재고를 같은 책으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그런데 헌책은 절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근년 일대 화제를 일으킨 스테디셀러 유발 하라리의 『호모사피엔스』 라는 책을 어느 헌책방에서 손님에서 판매했다고 치자. 그 헌책방은 『호모사피엔스』가 판매되고 없는 그 빈자리를 같은 『호모사피엔스』로 메울 수가 없다. 일반서점에서는 너무나도 쉬운 일인데 말이다.

앞에서도 말한 공급의 자의적이면서도 비균질적 특성 때문에 헌책방은 동일한 종의 상품을 복수로 확보해서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지극히 적다. 아마도 상품 매입과 유통, 재고의 수급 구조가 헌책방과 일반서점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어쩌면 이 차이에서 발생하는 헌책방의 태생적인 ‘장애’가 역설적으로 헌책방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아이템이 동일하게 공급되지 않으니까 손님들은 그만큼 희귀하고 희소한 책을 마치 유물을 발굴하듯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도 그렇겠지만 책 역시, 누구나 가질 수 있을 가능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가치가 떨어진다. 헌책방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단 한 권의 책을 누군가에게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고, 이것이 바로 일반서점과 경쟁할 수 있는 헌책방만의 메리트일 것이다.   

기증받은 책들
기증받은 책들

책방을 연 이후 나는 꾸준하게 헌책을 매입해왔다. 책이 팔린 만큼 그 자리를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한 달에 300부 정도가 판매되었다고 치면 서가 한쪽이 텅 비는 셈인데, 나는 어떤 식으로든 그 수만큼의 헌책을 구해서 서가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나는 주로 청계천과 동대문 일대의 대형 중고서점을 직접 다니면서 그곳 대표님들을 통해 헌책을 공급받았다. 매입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재고를 확보하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판매와 매입을 시소를 타듯이 반복하던 중 긴 가뭄을 해갈하는 한줄기 소나기와도 같은 솔루션이 내 앞에 나타났다. 솔루션이라기보다는 축복과도 다를 게 없는 선물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바로 천사와도 같은 책 기증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어느 날, 소설가 K선생님과 출판사 P대표님을 필두로 출판평론가 B선생님, 인문학자 J선생님, 정치학자 K선생님, 옛 출판사 동료 등 많은 지인들이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기꺼이, 선뜻 우리 책방에 차례차례 기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수량도 많게는 1000부에서 적게는 기십 부에 이르렀는데 당연히 한 권 한 권이 나에겐 귀하디귀한 씨앗이고 밀알이고 자산이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인상적인 기증은 영화배우 오지혜 님에 의한 것이었다. 배우 오지혜 님의 부친은 후배 배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원로배우 오현경 선생님이다. 그런데 오지혜 님이 내게 연락을 해서는 아버지 오현경 선생님의 자택 서재를 정리하고 있는데, 거기서 나온 책들을 조건 없이 우리 책방에 기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실 오지혜 님은 지난 봄 이미 한 차례 오현경 선생님의 책을 기증해주신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 2차 기증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극한 존경과 고마움을 표하면서 오지혜 님과 책을 기증 받을 날짜와 시간 등을 정했다. 

기증받은 책들
기증받은 책들

그리고 마침내 책을 기증받기로 한 날, 나는 오지혜 님이 알려준 오현경 선생님의 자택으로 가서 귀한 책을 받아 왔다. 자택에는 오현경 선생님은 안 계셨고, 오지혜 님과 그의 부군인 영화감독 이영은 님이 계셨다. 그들은 대형 캐리어 세 개와 박스에 이미 기증할 책들을 모두 수납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의 소회를 나는 SNS에 이렇게 올렸다.

“후배배우들이 다들 존경하는 원로로 꼽는 오현경 선생님 댁에 가서 서재에 있던 책을 기증받아 화물택시에 싣고 책방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따님이자 역시 명배우이신 오지혜 쌤이 엊그제 연락을 주셔서 기증의사를 밝히신 것이다. 오지혜 쌤은 지난봄에도 한 차례 오현경 선생님이 보시던 책을 기증해주신 바 있다.

비도 오는데 오지혜 쌤의 부군이신 이영은 감독께서 무거운 책박스를 같이 옮겨주셨다. 이영은 감독님은 남자가 봐도 감독이 아니라 배우를 하는 게 맞다 싶을 정도로 참 잘 생겼다. 오지혜 쌤 이영은 쌤 모두 너무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비에도 좀 젖고 땀에도 좀 젖었는데 젖은 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이 글에는 많은 격려와 축하와 박수의 댓글이 달렸음은 물론이다.

 

  

 

저작권자 © 은평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