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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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놓치지 않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부모들의 자녀 교육열이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문맹률이 가장 낮고 대학 진학률은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국토가 좁고 자원은 없으니 믿을 것은 인재뿐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교육에 대한 맹목으로 치달은 점이 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육열은 여전히 우리가 자부해도 좋을 만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높은 교육열은 지식산업 및 출판산업과도 밀접하게 연동되면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했다. 어린이책 출판 시장의 호황은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이전에는 일본을 위시한 외국 유명 브랜드의 시리즈물을 번역하고 이를 조악하게 편집해서 출판하는 데 급급했는데, 사회과학 서적을 내던 출판사들의 우수한 인력들이 급성장하는 어린이책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양질의 콘텐츠들이 생산됐고 이는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으로 이어졌다.

그 즈음 교보문고, 영풍 문고 같은 국내 대형 서점들이 어린이 책 매장을 두 배 이상으로 확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반적으로 1세부터 14세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책은 연간 약 1500만 부 가량이 출판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년에 출간되는 전체 신간부수에서 어린이 책이 차지하는 비중은 13~15퍼센트를 차지한다.  

어린이 전집 Ⓒ 김도언 작가
어린이 전집 Ⓒ 김도언 작가

그렇다면 이렇게 해마다 1500만 권씩 제작되는 어린이책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책방을 운영하면서 나는 책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헌책을 종종 매입하기도 한다. 내가 직접 청계천이나 을지로 일대의 규모가 큰 중고책방을 돌며 책을 사오기도 하지만 동네 주민들에게서도 적지 않게 책을 사들인다. 

개업할 때부터 책방 외벽의 창문마다 ‘중고책·헌책 매입’이라는 글씨를 인쇄한 선팅지를 붙여놓았는데 그걸 본 주민들이 문의를 해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이 책방에서 매입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 책의 90퍼센트 이상이 모두 어린이 청소년용 책이다. 그들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 교육을 위한 도서 구입에 넉넉지 않은 지갑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이제 책들은 더 이상 읽을 사람이 없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며 집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처분 대상으로 전락했을 터이다. 

매매 문의를 하는 분들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우리 책방은 어린이 및 청소년용 도서를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정중히 애초부터 매입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다. 책을 되파는 것에 실패한 부모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기증을 하거나 버리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기록적인 저출산 시대에 따른 수요 부족과 교육용 콘텐츠가 디지털화되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압도적이고 육중한 물리적 실감을 갖는 책의 기증처를 찾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결국 대부분의 책들은 어떤 식으로든 버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주택가 골목을 산책하다 보면 집 앞에 노끈 등으로 묶거나 그냥 박스에 담아서 내놓은 책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그 책들도 대부분 어린이용 동화전집이나 교양시리즈물이다. 

백과사전 Ⓒ 김도언 작가
백과사전 Ⓒ 김도언 작가

어렸을 때 나는 유난히 사전에 집착했다. 각종 사전들을 옆구리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특히 백과사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읽을거리였다. 백과사전을 통해 얻은 잡학지식들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학교에서의 수업 시간에 내 지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주었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다만 내가 모르고 있던 어떤 사실과 가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어린 나이에도 정말이지 순수한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집에는 백과사전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이나 친구네 집에 있던 백과사전을 한 권씩 빌려와서는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열심히 읽고는 했다.(물론 그것은 민폐였으리라.) 그래서 나는 지금도 길거리에 버려진 책무더기에서 사전을 발견하면 그것이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져오고는 한다.

우리 책방에 각종 어학사전이 적지 않게 갖춰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실 어학사전에 담김 막대한 정보의 양은 스마트폰으로 검색만 해도 간편하게 습득할 수 있다. 무거운 사전을 가지고 다닐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전에 대한 나의 예외적인 경외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결코 버릴 수가, 버려질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봄, 중고물품을 공유하거나 사고 파는 D마켓을 통해 전32권짜리 원색동아백과사전을 무료로 기증한다는 포스팅을 본 적이 있는데, 즉시 연락을 취해 그것을 책방에 가져다놓은 것도 사전에 대한 나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다. 그 백과사전 시리즈는 크고 무겁기가 징그러울 정도여서 다 옮기고 나서는 뼈마디가 쑤실 정도였지만 책방 서가에 꽂아놓고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이 풍족할 수가 없었다. 32권에 담긴 전체 콘텐츠가 지금은 USB 하나에 모두 수렴되는 것인데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악 과목 필기시험에 <백조의 호수>를 작곡한 러시아 음악가의 이름을 묻는 주관식 문제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름 뒤에 붙은 '스키'까지만 생각나고 도무지 차이코프스키라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려운 문제도 아니어서 더 속이 상했다.

당시 나는 친구네 집에 있던 《인명백과사전》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거기서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신기한 이름을 가진 러시아 소설가를 한 사람 알게 되었다. 정답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주관식 답란을 그냥 비운 채 시험을 끝내고 싶진 않아 거기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적어 넣은 기억이 난다. 그때 내 마음속의 진한 아쉬움도 선명하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스키'는 스키지만 그게 채점 시 참작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튼 그러고 수십 년이 흘러 난 그 소설가의 이름을 딴 책방을 하고 있으니 인생은 신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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