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열어 봄날 언덕으로 향하는 민초들의 초상이 그의 노래 속에

학교로 통하는 모든 문은 봉쇄 되었습니다. 정문 앞 사거리는 전경을 실어 나르는 닭장차의 주차장이 되었고 골목마다 두터운 진압복과 방패 곤봉으로 무장한 전경들은 드나드는 학생들의 가방을 뒤적였습니다. 불심검문을 거부한 여학생은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했고 가방에서 사회과학 세미나의 문건이라도 발견된 학생들은 마치 도둑질하다가 현행범으로 잡힌 사람처럼 전경들의 손에 끌려 닭장차에서 심한 취조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 무리의 백골단이 길거리의 한쪽을 점거하고 그들만의 거룩한 의식을 악에 찬 기합소리와 발 구름으로 위세 하는 사이로 학생과 시민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걸었습니다. 1990년 전국 농민회 총 연맹를 결성하고 우루과이 라운드에 반대하는 연합공연 “우리는 진짜 농사꾼”을 열기로 예정되어 있던 경희대 앞의 풍경입니다.

 원천봉쇄를 뚫고 그가 노래 부르다
 
노천극장은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습니다. 행사에 참여 하기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농민들은 학교입구 곳곳을 지키고 있는 전경들의 원천봉쇄를 뚫지 못하고 학교주변을 맴돌았고 행사에 필요한 장비를 실은 차량도 정문을 통과하지 못해 음향 조명은 물론 무대조차도 세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관세 및 다자간 무역 협정으로 대책 없이 밀려들어올 외국산 농수산물의 수입을 막기 위해 가을걷이도 포기하고 상경한 농민들은 “우루과이 라운드”는 절대 참여하지 않겠다던 노태우 정부의 거짓말을 자식 같은 전경들이 휘두르는 곤봉으로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출연자도 거의가 들어오질 못했으니 행사가 시작되어야 할 시간이 임박했음에도 노천극장엔 공연 스텝과 전농 관계자 몇몇 그리고 나 같은 학생들만 두리번 거리는 정도 였습니다. 총학생회에서 쓰는 집회용 앰프가 설치되고 연극 동아리에서 급히 수집한 조명이 초라한 불을 밝혔습니다. 농민들의 울분에 찬 함성으로 시작해야 할 공연은 마땅한 깃발하나 없이 100여명의 관객들만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운데 약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농 의장의 발언이 끝나고 그날 출연자중 유일하게 원천봉쇄를 뚫고 들어온 그가 기타를 메고 나왔습니다. “맞벌이 영세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셋방에서 불이나 방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권씨는...”신문에 난 조각 기사를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그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러 어린 두 영혼이 슬픔 없는 먼 곳으로 떠나며 “엄마 아빠 안녕”이라는 말을 남길 때쯤 나는 목 메어 부르는 그의 노래 소리 보다 더 슬픈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우리들의 죽음”은 가난한 복학생의 스산한 자취방의 노래였고 땅을 잃은 농민의 분노이기도 했으며 새벽시장으로 향하는 고단한 노동자의 지친 발걸음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보았던 그의 무대 중 가장 초라했던 그날 . “모든 예술의 감동의 최고치는 눈물이다”라는 고 조태일 시인의 말을 그의 노래를 통해 확인했으니 그는 나에게 노래라는 가장 진중한 화두를 선사한 셈입니다.
 
이후 그즈음 발표된 “아! 대한민국”에 수록된 모든 곡들은 시도 때도 없이 흥얼 거리는 나의 애창곡이었고 교내행사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었습니다. 후배들과 함께하는 세미나에는 “우리들의 죽음”을 뒷풀이 때는“인사동”이나 “황토강으로”를 이듬해 많은 이들이 청춘을 불살라 민주주의의 거름이 되고자 했을 때는 “일어나라 열사여”를 불렀습니다.
 
중얼가요 그 많은 얘기들
 
중학교 일 학년 때 처음 잡은 기타가 손에 익을 무렵엔 “촛불”과 “시인의 마을”의 기타 연주법을 채보 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3핑거 주법으로 연주하는 “시인의 마을”은 들을수록 오묘해서 카세트 테잎을 돌리고 또 돌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늘어진 테잎에서 나오는 소리를 잡아 헤진 바짓가랑이 바느질 하듯 한음 한음을 기타 지판에 옮겨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춰진 음악이 되었을 때는 이미 정리된 악보를 보고 연습한 “로망스”나 “알함브라의 궁전”을 완주했을 때 보다 더 큰 포만감이 있었습니다.
 
90년대 중반쯤 호암 아트홀에서 그들 부부의 공연이 열렸을 때 관객들 중 그의 모창을 제일 잘하는 사람 뽑기 이벤트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상품이 별게 없어서(?) 나가진 않았지만 한때 나도 그와 똑같은 목소리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군대 시절 삽질 작업 중 휴식시간이나 식사 후 쉬는 시간엔 고참들이 내 옆에 모였고 나는 그때마다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을 읊었습니다. 채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고참들은 “저 시키 똑같다 똑같애”하며 키득대곤 했는데 지금 생각건대 그들은 나의 노래가 좋았다기 보다 나의 모창이 더 좋았던 겁니다. 복학 후 노래패 대표를 맡았을 때 주로 후배 여학생들이 불러달라고 청한 노래도 대부분 그의 노래였는데 “서해에서” “실향가” “얘기2” 등등이었으니 아마도 나에게 그의 노래는 힛트곡 아닌 것이 하나도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 음악의 장르가 무엇이냐를 질문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냥 포크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중얼가요”라고 대답합니다. 스스로는 “중얼가요”의 창시자라고 얘기하지만 나의 음악적 전력으로 볼 때 중얼가요의 효시는 그가 맞습니다.
 
학전대표인 김민기 선배의 초청으로 구 동독의 반체제 가수이자 “투덜가요”의 대명사인 볼프 비어만 (wolf biermann) 이 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김민기 선배와 그 그리고 안치환과 내가 학전 옆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마침 세계의 포크음악에 대한 얘기가 나온 터라 나는 그의 음악이야말로 세계적인 포크라고 말했고 그는 무슨 그런 헛소리 하냐고 그런 소리 말라고 정색을 했습니다. 무안해서 그 뒤로는 별말 없이 지냈지만 제3세계음악사에 그의 음악이 올려지지 않는다면 그 음악사는 거짓일거라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용산참사가 나고 쓸쓸한 마음을 한잔 술 외에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던 날 그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오는 막차를 놓치지 않았으니 마음보다 앞서가는 첫차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듯 하루라는 생의 끈을 붙잡고 어둠 걷히는 새벽을 열어 초록 봄날의 언덕으로 향하는 우리 민초들의 초상이 그의 노래 속에 있었습니다.
 
그가 “리철진 동무에게” 이후 사회적 파장을 담은 노래와 발언을 그만둔 이유를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는 사람 끝없는 기다림의 막막함도 희망으로 엮어내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언젠가는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노래 한곡 하기 전 발언이 15분이어도 좋은 그의 무대가 그리워지는 요즘 그가 가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다시 무대에 섭니다. 그가 사회적 발언 중지 선언이후 비상구로 삼았다는 사진으로 공방을 내도 괜찮을 정도로 숙련된 가죽공예로 만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새로운 날들의 기약을 담은 노래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12월이면 성공회대 대학원의 “신영복 함께읽기”수강생들이 신영복 교수와 함께하는 종강 모임을 콘서트형식으로 엽니다. 재작년에 그가 출연 했는데 공연 축하 인사와 그의 소개를 김성수 당시 성공회대 총장이 맡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다음 분 소개 할께요. 이분은 말이지 국보 같은 가수지요. 아니 아니 같은은 뭐야 그냥 국보지요 국보. 여러분 잘 아시는 정태춘 선생을 소개 하겠습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긴 함성과 오래토록 울리는 박수소리로 그를 맞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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