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화되고 주변부로 밀려나는 청년들

남상백 / 역촌동 청년
남상백 / 역촌동 청년

은평구의 자랑, 은평시민신문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다. ‘2020년,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 달라는 것이다. 청탁 카톡을 보고 잠시 갸우뚱거렸다. 여러 가지 의문이 내 머리를 스쳐갔기 때문이다. 

‘내가 청년인가?’, ‘그래 청년이었지.’ ‘그런데 청년이 뭔데?’ 하는 물음표들의 싸움에 잠시 머리를 내어놓고 멍 때리기를 어언 3분. 결국 내가 청년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고 글을 쓰기로 했다. 한국과 은평구에 사는 청년이 나 혼자도 아닐 것이고, 청년들마다 살아가는데 느끼는 불편부당한 이유와 고민이 다 다를 것이다. 때문에 모두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몇 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청년이 누군지 모르겠다.’ 가장 먼저 느끼는 불편함이다. 나는 청년이 맞다. 그런데도 청년이 누군지 모르겠다. 왜냐, ‘청년’을 정의하는 기준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에서는 청년을 15세 이상 29세 이하로 정의하고 있고 다. 올초 제정된 청년기본법에서는 19세 이상 34세 이하로 정의한다. 보통 2030을 청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년에 대한 통념도 다르고 법도 다르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 보니 청년을 ‘자원’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애초에 사람을 인적 자원이니 뭐니 하면서 개발하네, 동원하네 하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청년은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순수한 마음으로 청년 활동과 사업, 운동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청년이라는 자원을 많이 확보하고 싶은 검은 속내를 감추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솔직히 말하면 불쾌하다. 당신들의 사업과 계획안에서 청년들은 그저 숫자와 규모로 파악되고 만다. 대상화되고 주변부로 밀려난다. 국가·시·구 단위, 하다못해 정당이나 동 단위까지도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청년층을 때로는 쪼개고 때로는 합치면서 청년 자신들이 담론을 키우고 정체성을 형성할 틈을 주지 않는다.

청년이라는 대상과 삶이 파편화되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불편함이 따라온다. 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청년의 나이도 다르다, 심지어 놓인 상황과 맥락도 다르다. 누군가는 취업준비생이고, 누군가는 노동자이다. 누군가는 학생이고, 누군가는 자영업자이다. 은평구에서 청년 활동을 할 때도 마음을 모으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다들 달랐기 때문에. 

게다가 요즘에는 다원주의 열풍이 부는 듯하다. “네가 옳으면 나도 옳다”는 것 말이다. 때로는 이런 자세가 유연함으로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 노동자도 옳고 기업도 옳다고 유보할 수 있을까?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삶 앞에서 역차별을 이야기하며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건강한 일일까? 요즘에는 누군가가 파편화와 다원주의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연대로 손해를 볼 사람들이 아닐까?

이런 현실들 앞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제한된다. 청년과 청년이 속한 사회 전체의 상상력이. 거기서 오는 무망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들은 너무 복잡하고 단단해서 치울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리 내부의 분열은 더 이상 수습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른 것만 같다. 

이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기분이 나빠서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래서 꼬장꼬장한 마음을 가지고 뭐든 해보고 싶지만 녹록치가 않다. 지역사회 안에 공동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환대하고 지지하고, 실패하고 상처 입은 구성원을 안아 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한 사람의 실패나 좌절을 그 사람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사회는 너무 나쁜 사회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크게 무너질 정도의 실패는 개인 간의 격돌로 일어날 수가 없다. 사회나 구조 간의 격돌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개인보다 거대한 사회에 얻어맞아 생긴 상처를 한 사람이 혼자 치유해낼 수 있을까? 

물론 몇몇 ‘난 놈’들은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사회로부터 입은 상처는 건강한 공동체가 치유해줄 수 있다. 상상력과 실천의 회복, 연대의 회복은 공동체의 회복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은평구 내에서 다양한 모습의 공동체를 지원하는 사업이 끊이지 않았으면 한다. 관의 지원을 끊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나에게도 좋은 공동체들이 있다. 조금 느슨하긴 하지만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스터디, 동아리 등이다. 공동체는 계량하거나 직관적인 성과로 보기는 힘들다. 마을 활동가들과 관이 부딪치거나 고민하는 지점이 그곳일 것이다. 좀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돈이 흐르는 곳에 마음이 흐른다.”는 말이 있다. 공동체에 돈과 마음을 흘려보낼 줄 아는, 여러 방해와 비판에도 철학을 가지고 꿋꿋이 버틸 줄 아는 곳. 그런 은평에 산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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