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진료실 일기' 보여드릴게요
이 코너는 진료실 일기라는 코너이지만, 실제로 일기를 보여드린 적은 없었네요. 오늘은 진짜로 제 일기의 한 자락을 보여드릴게요.
같이 일하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의사 구인에 난항을 겪고 있던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가정의학과 의사들이 살림과 같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으로 일하러 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의사들은 언제 실력이 제일 좋아, 그러니까 가정의학과 의사는?” 의대생 시절에 배웠던 그 수많은 희귀 질환들은 이제 이름조차도 가물가물해. 어쩌면 지금은 감기 밖에 모르는 것 같아.” |
맞아, 나는 감기밖에 몰라.나는 대화를 하다가 문득 내가 감기밖에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밖에 진료할 수 없는 그런 의사가 된 것인가.
그래도 의대 다닐 때에는 감기조차 몰랐는데, 이제 감기는 조금 아는 것 같아.
이 계절의 감기와 저 계절의 감기를 알고, 이 사람의 감기와 저 사람의 감기를 알지.
감기의 첫째 날과 감기의 둘째 날도 알아. 그러고 보면 그동안 많은 것을 배운 것 같기도 하네.
감기를 진료하려면 감기를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폐렴이나 천식, 중이염이나 부비동염이 아니고,알레르기 비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동네에 요즘 무슨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3~4일 쉬면 나을 감기인데도 직장을 쉬지 못하니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환자의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
단순한 감기에는 항생제가 필요 없다지만 감기로 인한 합병증이 잘 생기는 아이니까 항생제를 복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도 파악해야 한다. 왜 예방접종을 받아도 감기에 걸리는지, 그럼에도 왜 여러 가지 예방접종은 필요한지, 왜 대체 감기 예방접종은 개발되지 못하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엔 교과서와 논문을 통해 배우는 줄 알았다. 교수님들에게 선배님들에게 물려받는 것이 의학 지식인 줄 알았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모두 환자들에게서 다시 배운 거다. 감기도 모르던 내가 이제 감기는 조금 알겠네 싶은 것은, 우리가 진료실에서 함께 보내왔던 시간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