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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증인, 이종열 애국지사를 만나다일본군 부대에서 필사의 탈출로 광복군에 합류한 독립운동가
  • 박은미 기자
  • 승인 2018.08.2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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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열 애국지사. 현재 95세로 신사2동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제공 : 반짝반짝사진방)

1921년 경북 예천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종열 지사는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일본인들이 만든 ‘특별청년훈련소’에 입소하게 된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고 있던 때다. 집안형편도 어려웠지만 일제의 교육이 싫어 왜놈들이 세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었다. 

‘특별청년훈련소’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이 급격하게 확대되면서 점증하고 있는 군병력의 확충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일제가 자신들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인청년들을 훈련시킨 뒤 전쟁터로 보내기 위해 설치한 훈련소였다. 

훈련소에서 군사훈련을 시작한 지 1년쯤 지나 일본군 부대에 입소를 하게 된다. 입소를 한 이상 무조건 군대를 가야했다. 그러지 않으면 역적으로 몰려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은 후 일본군 부대에 입대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평양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군 부대(가네하라 42부대)는 평양의 대동강 모란봉 근처에 있어 경치가 좋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종열 지사는 해외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이 지사를 흔들어 깨운 건 일본군 부대에 먼저 와 있던 한국인 대학생들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 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서를 읽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선언을 한 것을 빌미삼아 일본 유학중이던 한인 대학생들을 잡아 일본군 군대에 보냈다. 어느 날 그렇게 끌려온 유학생 중 한 명이 이 지사를 비롯한 한국인들에게 말했다.

“왜 군대에 왔나? 누굴 위해서 일본군 부대에 온 것인가?” 

친구 한 명이 쭈뼛거리며 “일본 천황을 위해 온 거 아닌가?”하고 대답하자 “이런 불쌍한 인간들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느냐”며 한탄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데 어떻게 왜놈을 위해 죽으려고 하느냐 그 놈들은 우리의 역적이 아닌가?”하며 “이틀 뒤에 이 부대를 떠날 텐데 그 때 동복을 받으면 중국으로 가고 하복을 받으면 대동아전쟁의 격전지로 가게 되어 다시는 고향산천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학생 선배는 “동복을 받아 중국으로 가게 되면 무조건 북경으로 가라. 거기 가면 독립운동을 하는 선배들이 있으니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까무러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찾아가야 한다, 일본군 부대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유학생 선배 덕분에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당시 일본 군대에 잡혀온 한국인들이 1개 중대에 50~100여 명씩은 있었는데 일본에서 붙잡혀 온 유학생 선배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일본군 부대에서 도망쳐 북경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종열 지사는 북경에서 3개월의 전시 훈련을 마치고 미국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향했다. 일본 군복을 입고 실탄 15발씩을 앞뒤에 차고 수류탄을 허리춤에 차고 어깨에는 보급품을 짊어진 상태였다. 기회를 엿보던 한국사람 8명이 중국 호북성 신점진에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다시 붙잡히지 않으려고 무조건 높은 산으로 올라서 이틀 동안 밥도 굶고 숨어있었다. 

이종열 애국지사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들 (사진제공 : 반짝반짝사진방)

필사의 탈출로 중국군 만나다 

중국군 편의대 부대에 합류한 이종열 지사는 유격전에 합류하거나 포로로 잡혀 온 일본군인이 있으면 이름, 소속, 작전 등이 무엇인지 일본말로 물어봐서 중국군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중국군 부대의 상황은 아주 열악해서 몸이 아파도 먹을 약이 없고 치료를 할 의사도 없었다. 이후에는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입대하여 광복군 전방공작원으로서 정보활동 및 한중 합동작전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다 광복을 맞이했다.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바로 고국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군인이니까 당연히 군복을 입고 무기를 차고 들어와야 한다는 입장과 미군정 시절이라 무기는 안 된다며 입장이 맞서다 1년이 지나서야 광복군 군복을 맞춰 입고 귀국할 수 있었다. 서울에 와서는 우이동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이미 미군정이 터를 잡은 마당이라 귀국한 광복군의 입지는 애매했다. 

당시 미군정 시절, 귀국한 광복군에게 한국군에 들어오면 모두 간부급 대우를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광복군 선배들은 대한민국 국군으로 인정해주면 모두 재복무를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양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고향인 예천으로 내려가니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왔다며 부모님과 고향사람들이 기뻐했다. 고향에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데다 이념전쟁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중국군에 있었다는 말을 하면 분명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테니 무서워서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생애 두 번째 전쟁을 겪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군대에 갔다. 가족들은 그냥 남아있기를 원했지만 군인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입대 후 제주도 모슬포 경비중대, 동두천 미군부대 등을 거쳐 의병제대를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이후 농사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 강원도에서 탄 장사를 시작했다. 그 무렵 서울에서 광복군 선배들이 보낸 엽서가 도착했다. 정부에서 독립유공자에게 포장을 수여한다고 하니 서울로 와서 공적서를 내라는 연락을 받고 탄 장사를 정리하고 1969년 서울로 이주했다.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 글은 '독립운동가 헌정 매거진 애국지사 이종열'과 '반짝반짝사진방'에서 진행한 이종열 애국지사 인터뷰 내용을 참고하여 재구성 한 것입니다. 

박은미 기자  yasodhara@ep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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