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란 말에는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사진 제공 윤수정

어쩌다 보니 백련산 자락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태어나 자란 곳만큼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취 생활까지 포함하면 21년인데,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불광동 산동네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예전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달동네가 남아 있던 그곳은 서울이라는 낯설음을 줄여주는, 친숙한 ‘동네’ 느낌이었다.

북한산 자락도 그렇고 백련산 자락도 그렇고,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숲이 가까워 공기가 맑고 시원하고, 무엇보다 골목이 살아 있어 좋았다.

골목이란 말에는 뭔가 정겨운 울림이 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과 왁자지껄한 이미지. 항상 누군가가 존재하는, 말하자면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다.

첫 번째 골목은 불광동 언덕길이었다. 왕복 4시간이나 걸리던 출퇴근 시간을 줄여보자고 불광동에 방을 구했는데, 불광역에 내려 불광초를 지나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했지만 서울치고는 너무 밝지 않은 밤풍경이 좋았다.

주말이면 퇴근길에 단골 책대여점에 들러 만화책을 빌렸고, 문구점을 찾아 헤매다가 불광문고를 발견하고 기뻐했고, 동네 골목길을 탐험하다가 반대편 동네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산책 좀 하겠다고 나섰다가 수리봉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그렇게 사방으로 이어진 길이 재미났다.

백련산 자락은 또 다른 골목을 보여줬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더 비좁은 골목들이 뭔가 어수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어지는가 싶으면 끊기고, 끊기나 싶으면 이어지는 복잡한 골목길에서 여러 번 헤매며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사진 제공 윤수정
사진 제공 윤수정

이 동네 골목에는 어느 집에나 나무 한 그루씩 있었다. 대추나무, 감나무, 목련, 모과나무, 벚나무, 넝쿨장미 등등. 나무뿐 아니라 집 앞에 화분이 놓여 있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 상추, 고추, 깻잎 따위는 물론이고, 수세미 덩굴이 아치를 그리는 곳도 있었다. 아마도 이 동네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사람들, 연령층 높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짐작해 봤다.

반듯한 길은 아니었지만, 골목에서는 아직까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웃끼리 인사 나누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 모습이, 골목을 하나의 풍경으로 완성했다.

비록 부자 동네는 아니지만, 없는 사람들도 어울려 살 수 있는 동네가 은평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골목이 서로를 이어주는 통로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사를 할 때마다 새로운 골목을 탐험하는 건 재미난 일이었다.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할 것 같아 두근거렸다. 어느 봄날에는 아주 근사한 벚나무에 꽃이 가득한 집을 발견하고는 부러워했고, 뜨거운 여름날에는 아주 허름한 옛 집들이 즐비한 골목을 발견하고는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추억 속 골목길은 모두 사라졌다. 은평에 와 내가 살던 곳은 어디 하나 빠짐없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버렸고, 지금 또 공사 중이다.

몇 년 전까지 살던 곳에는 옆 건물 담장에 딱 붙어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지치고 힘든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길, 그 느티나무를 보면 안도감이 들었다. 한 아름이 넘는, 수령이 백 년은 되고도 남을 듯한 그 나무는 사시사철 느낌이 다른 골목길을 만들어 냈다.

봄에는 연초록 잎사귀가 반짝거렸고, 여름에는 짙푸른 잎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가을이면 노란 잎들이,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같은 골목 같은 나무임에도 매번 다른 느낌이 좋아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가까이에 또 다른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어서, 두 그루 나무는 어떤 역사를 품고 있을지 궁금해했던 기억도 난다.

사진 제공 윤수정

옆집에 있던 그 나무는 공사가 시작된 뒤 자취를 감추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20년 백련산 자락 생활을 접고 봉산 자락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그곳도 구불구불 골목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사를 가면 당장 골목길 탐험부터 나서 볼 작정이다. 뭔가 또 멋진 발견을 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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