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를 읽고

오랜 시간 병으로 신음하던 아내를 간호하다 2007년 동반자살이란 극단적 방법을 택한 저자, 앙드레 고르는 <에콜로지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삶을 반추하다 죽음 직전에 발표한 책이기 때문일까요? 그가 택한 용어는 상당히 무겁고 어둡습니다. 

부제는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로 시작합니다. 왜 일까요? 대규모 생산 이후 인류는 소비를 끊임없이 거듭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종속됐기 때문입니다. 생산과 판매를 통해 달콤한 이윤을 맛본 기업들은 더 많은 소비가 이뤄지는 데 사활을 겁니다. 

더 큰 이윤을 창출을 하는 가장 세련된 방법은 실제 가치가 ‘1’인 상품을 ‘10’으로 둔갑시키는 겁니다. 바로 광고입니다. 실제 투입된 노동력의 값에 측정할 수 없는 무형 이미지, 즉 비물질적 요소를 더해 값을 극대화합니다. 원가를 알면 어안이 벙벙해지는 애플이나 삼성의 제품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허수, 즉 실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가격을 매기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 세계 금융시장에서 운용되는 돈의 액수가 실제 존재 가치의 세 배 이상이라고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숫자로 장난치는, 정의롭지 못한 자본주의 체제는 생산과 소비를 증식시키고 있습니다. 저자는 ‘소비자는 생산을 위해 봉사하고, 소비자는 생산에 필요한 판로를 보장’하고 있음에 비통해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저항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도 이해합니다. 실제로 한 가족 당 한 대의 자동차로도 생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차를 소유하며 생기는 이점을 알게 하고 그것이 높은 생활수준이라고 교육하는데 어찌 당해낼 수 있을까요? 판매 전략가는 이다지도 우리 속의 가장 은밀한 충동을 잘 다스립니다. 

자본주의는 이와 같이 인류의 강요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천연자원을 착취해 왔습니다. 이미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상실, 토지 사막화 등의 전례 없는 환경파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인류 역사의 종말이겠죠. 

그럼 저자가 말하는 해결책은 뭘까요? ‘경제적이며 생산적인 탈성장’입니다. 에콜로지카, 즉 정치적 생태주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죠. 이는 ‘인간이 스스로 인간다움을 한껏 드러내게 해주고, 인간다움을 자기 존재의 의미이자 절대적 목적으로 삼게 해주는 활동’을 말합니다. 생산과 소비가 인간적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수준에서 이뤄지고 그 이상은 추구하지 않는 것이죠. 

저자는 가장 빈번하게 필요한 부와 자원으로 ‘건강에 좋은 균형 잡힌 먹을거리, 양질의 식수, 위생적이고 쾌적한 주거환경’ 등을 소개하는데 ‘자급생산협동조합’ 형태로 추진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예로, 마을에 우물이 필요할 경우 주민들이 지력을 모아 우물을 파는 것이죠. 이 공동노동으로 마을 전체는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우물물이라는 공동 재산을 공평하게 누립니다. 저자가 말한 정치적 생태주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어떤 이윤 창출행위도 수반하지 않습니다. 상품 매매가 부재했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자급자족한 행위에 대해 침묵합니다. 만약 한 사업체를 꾸려 우물을 팠고 주민들에게 물을 팔았다면 국민총생산(GNP) 값은 발생한 이윤만큼 증가했을 겁니다. 자본주의의 맹점은 이같이 ‘다른 모든 형태의 합리성 위에 경제학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데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자본주의 덫에 빠진 현 시대는 세계적 위기를 맞을 것이고 결국 자본주의의 퇴조를 가져올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현실로 닥쳐올 경우 그 대안을 위해 저와 여러분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탈성장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강수돌 고려대 교수는 ‘따스한 햇살 아래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이 책을 정독하길’ 권했지만 저는 읽을수록 조바심만 났습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현 체제와의 결별에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제 못남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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