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에릭호퍼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지만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진정으로 새롭다고 느껴질 만한 책을 찾기란 대단히 어렵다. 어쩌면, 쏟아져 나오는 책 중에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찾는 짓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책을 찾는 데 게을리 하는 요즘에 대한 변명이라손 쳐도 아주 허튼소리는 아닐 터이다. 그러다보니 여태껏 접하지 못한 방식으로 쓰인 책을 보면 무척 즐겁다. 즐겁다 못해 행복감마저 느껴진다. 신물이 날 만큼 진부함으로 점철되어 있거나 그럴싸한 껍데기를 두르고 누구나 지껄일 수 있는 소리를 거창하게 나열한 책에 이골이 날 즈음이면, 참으로 다행히도, 어김없이 새로운 책을 접하게 된다. 최근 내 독서 생활에 한 줄기 단비가 된 책이 바로 <맹신자들>이다.
 
‘길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에릭 호퍼의 저작으로,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이라는 부제를 가졌다. 내게 이 책이 새로울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를 따져보자면, ‘단상’이라는 표현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단상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나아가, 다양하고 특출한 작가적 자산을 갖춘 개인이 행위 할 수 단상이란, 주관의 세계에서 외부를 향해 돌출하는 직관과 통찰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다. 에릭 호퍼는 이러한 층위의 단상을 엮어 책으로 냈으며, 양질의 경험과 깊고 꾸준한 사고에서 비롯된 그의 확신은, 대개의 경우처럼 미숙한 위악으로 그치지 않고 생동감 넘치는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물론 에릭 호퍼의 단상은 외부 세계로의 ‘돌출’에서 그치지 않는다. 집요한 내적 고찰을 바탕으로 인간 세계의 천태만상을 객관적인 언어로 이끌어냄으로써, ‘인간’과 ‘인간들(대중)’과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근본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따라서 책이 쓰인 1951년의 배경에 국한되지 않고 시대와 공간을 관통하는 그의 통찰은 투철하게 현존한다. 문구 하나를 빌려 오자면 이렇다. “우리 시대에 성공을 거둔 많은 대중운동 지도자들이 주창한 사상의 유치함을 보노라면 어느 정도의 생경함과 정신적 미숙함이 지도자들에게는 하나의 자산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체제에서, 선거를 준비하고 치르는 기간에 필연적으로 수발되는 대중의 행동양식 변화와 정당의 유세 활동을 대중운동(이 틀림없겠지만)으로 가정했을 때, 이 문구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긴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 땅에서, 혹은 저기 바다 건너 어느 땅에서도 문구가 보여주는 통찰은 빛을 발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편 <맹신자들>은 책 그 자체로 대중운동을 지향하는 활동가로서의 내 정체성에 대한 중대한 질문이 된다. 책에서 다루는 <맹신자>는 ‘각각의 운동(그것이 어떤 종교든 어떤 이념이든)이 목숨을 거는 숭고한 대의가 아무리 다를지라도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에 목숨을 바치’는, 광신도에 가까운 존재이다. 그리고 맹신자들은 ‘좌절한 사람에서 만들어진다’. 질문이 쏟아진다. 책을 따른다면, 대중운동의 성공 요건이란 맹신자를 만들어 추종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대중운동을 지속할 것인가? 나는 맹신자인가, 아니면, 맹신자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맹신자가 될 준비가 되었는가, 그리고 타인을 맹신자로 만들 준비가 되었는가? 질문을 꼬리를 끊지 않으면 최소한의 (활동가로서의) 업무조차 수행하기가 어렵다. 이를 테면 활동가인 나에게는 차라리 해로움을 더 많이 준 책이랄까.
 
그럼에도 <맹신자들>은 내 책장에서 책을 가장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자리를 앞으로 항상 지키고 있을 것이다. 활동가로서의 삶뿐만 모든 종류의 삶에서 전반적인 참고서이자 내 외부가 움직이는 근원을 살피는 지침서로 훌륭하게 이용될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책은 어김없이 내 세계를 상당부분 붕괴시켰고, 이제 내 세계를 새롭게 쌓을 일만 남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맹신자들>을 맹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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