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고약한 은평시민신문 창간 10주년 기념사

▲이지상 은평시민신문협동조합 이사장

가난한 자들의 인문학 클레멘스 코스의 창시자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뉴욕 근교의 한교도소에서 살인과 강도 사건에 연루된 한 죄수를 만났다. 그녀는 15년 형을 언도 받았고 8년 6개월째 복역 중이었다.

“사람들은 왜 가난할까요?” 뜬금없이 던진 그의 질문에 담담하게 그녀가 대답했다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는 정신적 삶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 이예요”.

정신적 삶이 종교일거라고 짐작한 그가 확인차 다시 물었다 “정신적 삶이란게 무엇 입니까?” 그녀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극장과 강연 박물관 연주회 같은 거죠”

얼마 전 손에 들었던 책 '거리의 인문학'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한참을 뒤적였다. 변호인이나 명량 같은 대 히트작은 그렇다 쳐도 꼭 봐야할 영화 60만번째 트라이와 제보자   조차 볼 엄두를 못 냈으니 나 또한 그녀와 다르지 않다. 강연을 하러다닌다는 명목이 그럴싸 하니 지난 수년간 누구의 강연을 들은 기억이 없고 연주회도 마찬가지다.

박물관이나 전시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전-蘭잎으로 칼을 얻다”를 본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자책하다가 결국 일반화의 오류로 빠진다. 어디 나만 그런가 말야.

임금이 포악하면 온 나라에 도적이 들끓는다고 했던가. 경제 대통령이란 구호도 모자라 이젠 “창조경제 앞으로 나란히”를 외치며 못된 훈육주임의 회초리처럼 시민들을 닦달하는 정부와 언론의 호사스런 가면극 뒤로 4자방(4대강,자원외교.방산비리)같은 희대의 사기극을 연출하며 빼먹을 놈 알아서 빼먹고도 “경제도 어려운데 무슨? ” 이라고 덮어버리는 허울좋은 자칭 지도층을 둔 나라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삶 이란게 고작 복채나 두둑히 싸들고 그저 잘되게 해주세요 조아리는 종교행위 말고 무엇이 있단 말인가

얼 쇼리스가 만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이 아니 자신이 가난한 이유는 단지 정신적 삶이 부족했던 때문 이라고.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책 한권 시집한줄 주연배우의 대사 한마디 어린 연주자의 클라리넷 선율 하나가 인문학이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모두 다 가난한 사람들 이라고. 러시아가 그야말로 시베리아 동토 같았던 경제 위기를 극복해낸 힘은 한 조각 빵이나 몇 다발의 루블화 꺼지지 않는 공장의 불빛이 아니라 다차(Dacha)와 공연 때문이라지 않는가.

은평 시민 신문 열 돌이다. 그간 뼈를 묻는 마음으로 함께해준 이름들을 기억해야 하는 숭고한 지면이다. 여럿이 함께 사는 소소한 일상도 담았다. 더 중요하게는 은평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횡포에 맞서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은평 시민사회의 입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벅찬 선언에 “나 여기 있소” 손 드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시민사회의 지형도 정치의 지형도 심지어 섯불리 들어서는 개발로 인해 은평의 지도도 변했다. 그러나 은평 시민신문의 시민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

“내 살던 동네와 사람들 그들과 함께 한 추억과 아픔 그것들이 아무리 멀리 내곁을 떠나 모든 것은 변할수 있어도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라고 노래 했던 mercedes sosa의 노래 to do cambia처럼. 10주년의 기념사치곤 꽤나 고약하다.

그러나 공론의 장에서 어깨펴고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할. 더욱 성능이 뛰어난 스피커가 되어 시민들의 삶을 당당히 전하는 매체하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것이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면 더욱 그렇다. 더 많이 깊어지자. 어느 소설의 한 문장처럼 살고 싶어서다. 동화의 맨 마지막장을 덮으며 조용히 가슴 쓸어내리고 싶어서다. 언 듯 생각난 싯 귀절 하나 소주잔에 떨궈 마시고 싶어서다. 은시문 10년 그리고 앞으로 10년 돈벌레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우리 인문학처럼 살자.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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