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있는데 약속 시간보다 10분 이르게 그가 들어섰다.

단아한 쥐색 정장차림에 넥타이가 봄날처럼 산뜻하다. 선한 눈매에 몸 전체를 흐르는 선이 둥글고 부드럽다. 어두웠던 실내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임성환.     ©은평시민신문
양심적 병역거부 감옥행 그후

임성환. 올해 나이 서른 둘. 연세대를 다니다 3학년 때 그만 두고 벤처 사업에 뛰어들었다. ‘칵테일’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대통령상도 받고 수출도 했으니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겠다. 사업에서 손을 뗀 후에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잡지 겸 출판사 <아웃사이더>를 인수 운영했다. 여기까지가 그저 평범한 사업가의 이력이라 할 수 있겠다.

내세우길 꺼려하지만 그가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국가폭력에 동참할 의사가 없다며 병역을 거부한 데 있다. 종교적 이유로 입대를 거부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평화적 신념을 이유로 내세운 경우는 드문 때였다. 2년여 재판을 끌다가 1년6월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 됐다.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가석방된 후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쉬고 있는 상태라고 할까요? 그냥 평범하게 살았어요. 논술학원을 운영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사교육 분야라 자랑스럽게 얘기하질 못한다고 덧붙인다. 슬슬 기지개를 켜고 있다고나 할까.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소리 안 나게 조용히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평구 연신내에서 새로이 학원 개원을 앞두고 있었고 <아웃사이더> 복간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뜸했던 지역 시민단체에도 발걸음을 시작했다. 감옥생활은 어땠을까.

“이런저런 트러블이 많은 재소자였어요.”

다소 긴장해 보이던 얼굴빛이 비로소 환해진다. 싱싱한 생기가 피어난다. 어디든 그럴 것이다. 긴 시간 집을 비우고 돌아온 여행자나 겨우내 긴 동안거를 마친 선승의 모습을 보면 인내와 고통을 견뎌낸 자의 맑은 정신의 힘이 느껴진다. 하물며 자기 결단에 의한 감옥행임에랴. 그는 감옥 안에서도 부당한 것을 참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트러블’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처음엔 사소(사동청소)를 하다가 나중엔 ‘내청’(내부청소) 일을 했어요. 교도소 전체를 청소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인데 아무래도 육체적으로 고되지요. 그 일이 저에겐 좋았어요. 배우는 것도 많았고. 감옥이란 일종의 특수한 사회인데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면서 참 여러 생각을 했어요. 삶의 축소판이랄까. 아무든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는 국가폭력에 동조할 수 없어 군 입대를 거부했다. 그의 행동에 국가는 감옥행을 명령했다. 그렇게 해마다 6백여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힌다. 그게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라니 그간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을 거쳐 간 것이다. 총 징역 년수로 환산하면 2만년이 넘는다던가. 이들의 대부분은 ‘여호와의증인’ 신자들이었는데 10여 년 전부터는 평화와 생명존중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여전히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지만 지금은 병역 대신 공공근로를 하는 대체복무제가 힘을 얻어 가고 있다.    
▲     ©은평시민신문
순응할 것이냐 저항할 것이냐

“어느 시대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있는 것 같아요. 중세나 조선시대 그보다 훨씬 이전인 원시시대를 지금의 우리가 바라본다면 몰상식하고 무가치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겠지요. 저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태도예요. 그것을 내재화하느냐 저항하느냐 하는….”

존재방식이라 했다. 국가가 요구하는 억압기제나 규범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순응하면 별 문제없지만 불응하면 불이익이 가해진다. 유·무형의 폭력이 더해진다. 그것은 한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라서 혹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 길을 피해간다. 그래서 아주 적은 숫자만이 좁은 길을 간다.

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아이티(IT) 업종에 있었으니 병역특례를 받을 수도 있었고 눈 딱 감고 군대 몇 년 갔다 오면 사업가로 잘 나갈 수 있었다. 문제는 남들 다하는 ‘눈 딱 감고’가 안 된다는 데 있다. 눈을 딱 감으려 하면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것이다. 어떤 평가를 내리든 세상에는 늘 이런 종류의 인간들이 적지만 늘 있어 왔다.
   
“양심이 명령하는 방식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존재하고 살고 싶은 거지요. 그것이 세상과 부합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순한 인상 뒷면에는 이런 강단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힘이 대상과의 공감에서 나온다고 믿는 편이다. 작고 여린 보잘 것 없고 가난한 그런 것들에게서 슬픔과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저와 같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해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이 밟히고 눌릴 때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데 그걸 스스로 할 수 있겠는가. 못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는 이들을 ‘나약한 자’라 손가락질 한다. 손가락질뿐인가. 돌도 던지고 침도 뱉고 때론 태워 죽인다. 그런데 아는가. 동물도 식물이 있어야 살 수 있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먹고 산다는 걸. 그리고 하나 더 식물은 홀로 살 수 있지만 동물은 홀로 살 수 없다는 걸. 
 
그가 여덟 살 때부터 스물다섯 해를 살아온 불광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가난한 동네였다. 불광동시외버스터미널을 놀이터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겐 하나의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못 살고 가난한 사람이 많지?” 그도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지내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 물음은 대학 시절을 거치면서 이렇게 바뀐다.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아야 하지?” 세상은 바뀌어야 하고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아웃사이더>라는 잡지를 복간하기 위해 그리 애를 쓰는 이유도 그 믿음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생각하는 평화에는 평등의 뜻이 크게 차지하는 것 같았다. 폭력 없는 세상을 꿈꾸다 보면 자연스레 경제적 문제로 이어진다. 평화란 어떤 식의 강자도 약자도 없는 상태 아니겠는가.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세상 아니겠는가.

그가 4월에 논술학원을 여는 까닭도 ‘사교육’이라는 내적 갈등을 견디는 이유도 좋은 잡지를 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전쟁 없는 세상’과 같은 평화활동을 하는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서다. 좋은 뜻으로 하는 기업은 망한다는 게 정설인 세상이다. 근데 정말 큰 기업가는 좋은 목표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앞으로도 그의 사업을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까닭이 여기 있다. 
 
양심이 가리키는 모양대로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는 속설이 있다. 성격이 운명이라는 말도 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어른들 말씀처럼 ‘심성이 참 곱다’는 말이 생각난다. 저 성격으로 살면 주변은 편할지 몰라도 본인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각박하고 거친 세상에 여린 심성으로 주변을 다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깨끗한 산소를 마시듯 기분 좋은 일이다. 
 
“최소한의 자기미학적 아름다움이 있는 삶을 꿈꿉니다. 조금 어렵지요?”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다. 수줍게 웃으며 덧붙이기를 자신은 지식인도 글쟁이도 아니란다. 그는 자신의 몫을 잘 알고 있었다. 회사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으니 그걸 살려서 자기 방식대로 ‘운동’을 하겠다는 뜻이리라. 자기미학적 아름다움이 있는 삶이란 무얼까. 내 멋대로의 해석이긴 하지만 이걸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최소한의 양심이 가리키는 모양대로 살고 싶어요. 그럴 때 아름답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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