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를 방울나무라고 불렀다. 어떤 이는 플라타너스라고 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지름 3~4cm 정도 되는 방울처럼 생긴 열매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 방울은 겨울철 내내 매달려 있기도 했다.
 
특별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땅바닥에 떨어진 방울 열매는 짓궂은 장난감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교정에는 아주 커다란 방울나무가 운동장 담벼락 근처에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실제보다 커 보였음을 감안하더라도 무척 커다란 나무였다. 높이는 거의 20m 가까이 되었고 가슴높이 나무둘레는 2m 가까이 되었다. 참으로 고마운 나무였다. 무더운 여름날 그 나무아래만은 뜨겁지 않았다. 누군가의 배려로 설치된 콘크리트 탁자에 앉아 기나긴 여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항상 고마웠던 것만은 아니다. 어떤 때는 그 아래를 지나가는 것이 공포였다. 무슨 나방의 애벌레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해에는 엄청나게 많은 벌레들이 그 나무를 공격했고 미처 나뭇잎에 자리를 잡지 못한 애벌레들은 공중 낙하해 땅으로 떨어졌다. 밑을 지나다 재수 없으면 애벌레가 머리 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몸에 긴 털이 잔뜩 나 있어 보기에도 섬뜩했다. 어떤 이는 송충이라 불렀는데 송충이는 솔잎만 먹는다는 속담이 있으니 송충이일리는 만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흰불나방 애벌레였다. 온몸에 검은색과 흰색의 긴털이 빽빽이 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으~으~으~다.
 
이들은 나뭇잎의 잎맥만 남기고 말끔히 먹어 치우는 놀라운 식성을 보여줬다. 노란 잎맥만 남은 나뭇잎 무더기는 보기에 안쓰러웠다. 이 해충은 고향이 북미다.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 후반 미군의 화물에 묻어 들어온 듯하다. 방울나무 역시 고향이 북미다. 나무가 그리워 수만km를 힘겹게 건너온 것일까?

자라서 이런 저런 책을 읽다 보니 방울나무를 버즘나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버즘나무란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나무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무껍질이 살갗에 버즘이 핀 것처럼 얼룩덜룩 벗겨지기 때문에 버즘나무라고 부른다고 했다. 요즘은 ‘버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드물 것 같다. 일종의 피부병이다. 살갗이 하얗게 덕지덕지 벗겨지는 병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피부병이었다. 아마 영양이 부족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확실치는 않다.
 
그러고 보면 이름이 예쁘지 않다. 그렇더라도 나무의 외형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버즘나무에는 대략 3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버즘나무이다. 플라타너스라고 흔히 부르는데 잎이 깊게 갈라지고 열매가 서너 개씩 달린다. 나무껍질은 큼지막하게 벗겨진다. 다른 하나는 양버즘나무이다. 미국플라타너스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잎은 버즘나무에 비해 덜 갈라지고 열매가 한 개씩 달린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나무껍질은 작은 조각으로 벗겨진다. 마지막으로 이 둘 사이의 잡종인 단풍버즘나무가 있다. 단풍플라타너스라 부르기도 한다. 잡종이다 보니 두 나무를 골고루 닮았다. 열매 개수도 중간이다.

버즘나무 종류는 튼튼하고 빨리 자라는 나무다.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하다. 상처를 입어도 스스로 낫는 힘이 강해서 여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나쁜 공기에도 잘 견디고 먼지나 나쁜 물질까지 빨아들이는 놀라운 나무이다. 그런 나무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도시에는 아주 많다. 특히 자동차가 쉴 새 없이 내달리는 도로 주변이 그런 장소이다. 그래서 버즘나무 종류는 도시 가로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열매가 하나씩 달리는 양버즘나무가 은행나무와 더불어 가장 흔하게 식재된 가로수이다. 도시환경이 열악한 곳일수록 더욱 그렇다. 버즘나무 종류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백년이 채 안 되었지만 들어와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 모두 인간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한번쯤 큰 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런 악전고투를 뚫고 상당히 크게 자란 울창한 가로수가 있다. 대학로에서 국립과학박물관을 지나 안국으로 넘어오는 창덕궁 앞 도로 가로수가 그 중 하나다. 멋있다. 어느 봄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걸어볼 만한 길이다.

버즘나무류는 가지치기에 아주 강한 나무인가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무지막지한 가지치기를 견디어 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서울시 성동구에 일이 있어 길을 가던 나는 나무말뚝처럼 처량하게 서 있는 양버즘나무 가로수를 보며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가지치기는 과학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나무말뚝처럼 만들어 버리는 서울시의 과도한 가로수 관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성동구에 비하면 은평구는 양반이다. 가로수가 간판을 가려서 장사를 못하겠다고 틈만 나면 가로수를 뽑아달라고 민원 제기하는 시민들이 있는 한 공무원을 욕하는 것도 바른 일은 아닌 듯 싶다. 이래 저래 양버즘나무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 고달프다. 

 사족 하나. 빛고을 광주에 살고 있는 양버즘나무에게 물어봤다. “요즘 어떤 분이 한강과 낙동강과 금강과 영산강을 하나로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겠다고 합니다. 님의 생각은?” “참 거시기허요~!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소~잉! 근디 모래무지랑 수달이랑 아무튼 그쪽에 사는 양반들한테 물어보고 허락은 받아 놓고 그런 소리를 한다요?” 

 

참고문헌

1. 이범영 정영진(1997) 한국수목해충 성안당. 459쪽.
2. 윤주복(2005) 나무 쉽게 찾기 진선. 687쪽.
3. 허북구 박석근 이일병(2004) 재미있는 우리나무 이름의 유래를 찾아서 중앙생활사.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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