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산과 숲이 이어져 숲 생물들이 마음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녹번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무언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물체를 보았다.  운전자가 아니었기에 부담 없이 그 물체를 쫓았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 물체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었다.  바로 꿩이었다.  기다란 꼬리 모양 쉼 없는 날개 짓 틀림없는 꿩이었다.  도로 양 옆에 조그마한 녹지가 있었다고 하지만 6차선이 넘는 도로를 날아 이동하는 꿩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지라 참으로 신기했다.  꿩은 나는 것이 다른 새들에 비해 서툰지라 더욱 그랬다.
 
이곳 북동쪽에는 북한산(북한산도시자연공원)이 자리하고 남서쪽에는 백련산(백련근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사이는 통일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옛날에는 이 고개가 도로로 단절되지 않았을 터이다.  사람이 발길이 닿으면서 조그마한 길이 숲 속에 생겼을 것이고 그 길로 수많은 자동차가 왕래하면서 숲은 사라지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을 것이다.
 
이 고개를 녹번이고개라고 부른단다.  이 고개의 이름에서 은평구 녹번동이란 행정 법정동 명칭이 유래되었다.  녹번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초기에 뜻 있는 조정의 고관들이 설 추석 등 명절이 다가오면 이곳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라에서 받은 녹(祿)의 일부를 이 고개에다 남몰래 슬며시 놓아 둔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본 당시 사람들은 고관들이 녹을 버린 것이라 생각하고 고개 이름을 '녹을 버린 고개'라 하여 녹번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도 있다.  본래 이 고개 석벽(石壁)에서는 산골(山骨)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산골은 자연동의 일종으로 푸른빛을 띠는 광물질이었으며 사람의 부러진 뼈를 붙여주는 데 쓰였다.  이 푸른(碌) 산골이 많이 난다고 하여 녹(碌)번이라 불렀다 한다.
 
'산골'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국어사전은 '산골을 한의학(동의보감 탕액편)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이황화철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황화 철강이다.  구리가 나는 곳에서 나는 푸른빛을 띤 누런색의 쇠붙이로 접골 약으로 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녹번이고개 마루터기에는 옛날부터 산골을 캐는 구덩이가 있었다.  산골은 민간치료요법으로 사용되는데 특히 골절이나 뼈가 약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채굴되는 산골을 구하러 몰려들었다.  일년 중 산골 신령이 나오고 들어가는 음력 3월 3일(삼짇날)이나 9월 9일(중앙절)에 최대 성시를 이루었다.
 
이러한 산골이 전국에 유명해진 계기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4월에 북한산성 축성공사가 시작되었을 때이다. 성을 쌓는 일이 본래 큰 돌을 사용하는 공사라서 사고로 뼈를 다친 인부들이 매일 속출하였는데  이때 이들에게 특효약으로 산골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서 있는 장소의 과거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다.  그런데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 장소가 기억하는 과거의 삶을 인식하는 사람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녹번이고개는 옛날에는 아주 험준한 고개였던 것 같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산천조(山川條)에 당나라 장수 동월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좁고 험준한 산세를 보고 "이곳은 군졸 한 사람이 지켜도 일만명의 군사가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록한 글이 실려 있다.

 
이곳은 도성 수비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며 또한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조선 고종 3년(1866년 9월) 흥선대원군에 의한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를 비롯하여 9명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군함 프리모게호 외 7척이 강화도에 침략하여 통진(通津) 문수산(文殊山)을 점령하고 서울까지 침입하려고 했던 병인양요때 양주목사 임한이 녹번이고개를 15일 동안 방어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험난한 고개는 당연히 호랑이와 같은 대형동물이 서식하고 있었으리라.  조선조 3대 태종(1401~1418)때 삼각산을 타고 내려온 큰 호랑이가 경복궁 담을 뛰어넘어 대궐을 침입하여 임금님의 침전까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어영장(御營將)인 김덕생이 화살 하나를 쏴 호랑이를 쓰러뜨림으로써 호환에서 임금님을 무사히 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지리지(地理誌)를 보면 무악재 고개가 높고 험준하여 쉽사리 통과할 수 없고 사나운 호랑이들이 고개 길을 지나는 나그네를 덮치기 일쑤였다는 기록도 있다.  160여 년 전만 해도 녹번이고개 부근 지역은 삼각산 줄기와 인왕산 줄기가 맞닿아 있어 산짐승들이 인가로 자주 출몰하여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옛이야기는 지금 모습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상 속의 이야기이다.

호랑이가 살았던 북한산은 고립된 섬이 된지 오래고 북한산에서 시작해 은평구 곳곳을 뻗어 내린 산세는 수많은 도로와 아파트 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렇게 찢어 발겨진 숲 사이를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꿩은 날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바라건대 끊어진 산과 숲이 이어져 숲 생물들이 마음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토목기술 생태복원기술은 그런데 쓰라고 있는 거다.  자연 그대로의 강을 억지로 연결해 높은 곳으로 흐르게 하는 데 쓰는 것은 누구 말대로 역천(逆天)행위이다. 

 인용문헌

1. 이성영(2004) 재미있는 새 은평이야기 어진소리.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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