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에서 과소평가된 김달진 끌어올린 ‘김달진문학상'
고도의 정신주의 추구한 시인에서부터 교편을 거쳐
팔만대장경 번역에 이르기까지 월하의 삶을 조명
이성모 관장 “월하의 문학 가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지역 문화 저변 넓히는 우리는 문화기획자"

김달진문학관 앞 김달진 흉상. (사진: 정민구 기자)
김달진문학관 앞 김달진 흉상. (사진: 정민구 기자)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이 은평에 제정된지 올해로 6년째다. 고 이호철 작가는 남과 북의 분단을 잇는 통일의 길목 은평구에서 50년 이상 거주하며 분단현실을 비롯해 민족, 사회 갈등에 관한 집필활동을 하다 2016년 타계했고 그의 문학적 뜻을 기리기 위해 은평구청은 2017년에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제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은 분단 문학의 거장 이호철 작가의 통일 염원 정신을 기리고 이어가기 위해 분쟁∙여성∙난민∙차별∙폭력∙전쟁 등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함께 사유하고 극복하고 있는 세계적 작가를 수여 대상으로 하고 있다. 

남과 북을 잇는 통일로를 품고 있는 지역 특성상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의 출발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다만 문학상 제정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낮은 인지도 문제는 본래 문학상 제정의 취지와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는지 다시 점검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번 기획취재에서는 지역민과 함께 하는 이호철 문학상이 되기 위해서 전국에서 오랜 기간 운영되어온 권위있는 문학상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 네 번째 방문지는 월하 김달진의 고향 경남 진해다.  

시인∙교육자∙승려∙한학자로 살아온 김달진
고도의 정신주의 시 세계로 불교시의 정신사적 흐름에 획 그어

월하 김달진의 생애. (사진: 정민구 기자)
월하 김달진의 생애. (사진: 정민구 기자)

월하 김달진은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저평가 된 인물 중 한명이다. 한국 현대 문학의 흐름에서도 월하는 시 전문동인지 ‘시인부락’에서 짧게 언급되는데 그치지만 그에 대한 학계 관심과 문단의 조명은 1990년대 김달진문학상과 김달진문학제가 시작되면서부터 높아졌다. 다시 말해 문학계에서 그간 조명받지 못한 월하 김달진의 업적이 사후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지역의 관심이 현재 그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김달진은 고도의 정신주의 문학세계관을 지향한 서정시인이었다. 20대부터 교편생활을 해온 김달진이 문단에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무애 양주동 선생의 추천으로 <잡영수곡>이 문예공론지에 실리면서 등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교이자 교사 생활을 이어가던 계광보통학교가 민족 항일 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교되자 월하는 민족 현실에 대해 절망과 좌절에 빠졌다.

이 당시가 1934년 무렵이었는데 월하는 좌절의 끝자락에서 불교와 연을 맺게 된다. 자녀와 아내를 두고 월하는 금강산에 위치한 유점사와 함양 백운산의 화과원에서 반선반농의 수도생활을 하며 승려로 지낸다. 김달진문학관 심화선 학예사는 “문학관에 김달진의 다양한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승려 생활을 할 때 머리를 깎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승려로 매진하던 그의 삶의 진지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사후에 그의 산문을 모은 <산거일기>에서 “나는 원래 산을 좋아했다. 이것이 입산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스님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칼은 구렁이 같이 흉물스러운 내 자신의 집착성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나 싶다. 장삼을 입고 합장하였을 때, 내심의 정제에서 느껴지는 화평한 심점. 이 것은 높고 아름다운 덕인 양, 나를 황홀한 경지로 이끄는 듯 하였다.”며 불교에 귀의한 그의 심정을 전했다.

그렇다고 그가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현한 서정시만 쓴 것은 아니다. 그의 시 <샘물>에서는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엿볼수 있다.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심화선 학예사는 “월하의 <샘물>은 마치 윤동주의 <자화상>을 떠올리게끔 한다. <자화상>이 일제 강점기에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표현했듯 김달진 선생도 같은 맥락으로 작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승려로 지내며 월하는 70여 사찰의 본사와 말사를 다니며 강론에 전념하는데 이때 시국에 대한 발언을 계속해 일제로부터 요시찰 인물이 되기도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김달진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을 김달진이 직접 눈속에 처박은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 이후 주변의 권유로 유점사를 탈출하여 만주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1945년엔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는데 그는 <아침>, <자유>, <그분들은 오셨다> 등을 통해 벅찬 가슴으로 방송을 통해 노래를 했다.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동아일보 주간이던 설의식 선생을 알게되었고 편집국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문학가협회의 부회장이 된다. 김구 주석이 참석한 청년문학가협회 창립모임에서 회장에 김동리, 부회장에 유치환과 김달진으로 확정된다. 이성모 김달진문학관장은 “이 당시가 김달진 선생이 한국 문단의 정점에 선 것이라 할 수 있다”며 월하가 어떤 위상을 지닌 인물인지 설명했다.

그렇지만 문단에도 불어온 이데올로기의 바람은 자연주의∙정신주의 세계관을 지닌 그에게 익숙치 못했다. 광복이후 서울에서 지냈지만 이를 청산하고 대구로 내려가 다시 교직생활을 시작한다. 1949년에는 6년제 진해중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자유민보의 논설위원과 해군사관학교 출강도 하던 중에, 남면중학교(현 창원남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직에 몸담다 1960년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월하 김달진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동국 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 번역사업 했다. (사진: 정민구 기자)
월하 김달진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동국 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 번역사업 했다. (사진: 정민구 기자)

교직생활 이후 김달진은 당시 동국역경원장이었던 이운허 스님을 법사로 모시며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한글 번역사업을 작고할 때가지 몰두하게 된다. 그의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불교와의 깊은 인연이 남달랐기 때문인데 월하는 20년간 대략 200자 원고지 15만장 정도의 불경을 번역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동국대 교수이자 김선학 문학평론가는 “그는 시인으로서 번역가와 승려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20세기를 드러내 놓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가다듬고 성찰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그의 관조적이고 달관적이고 불교사상에 침윤된 시세계는 그의 선배였던 한용운과 동국대학 후배였던 조지훈, 서정주에게로 이어지면서 불교시의 정신사적 흐름에 분명 뚜렷한 획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월하 김달진의 삶은 ‘교육자’, ‘시인’,’ 문학인 ‘불자’, ‘한학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의 삶의 면모가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데는 월하를 추종하고 기리려는 문학인들과 진해 지역 주민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김달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사랑문화인협의회’
방치된 그의 문학 세계에 날개를 달다

김달진문학관 이성모 관장. (사진: 유지민 기자)
김달진문학관 이성모 관장. (사진: 유지민 기자)

월하 김달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계기는 (사)시사랑문화인협의회가 1990년에 김달진문학상을 만들면서부터다. 김달진은 1907년 2월에 태어나 1989년 6월 작고했는데 그가 생을 마감하고 다음해에 그를 기리기 위해 시사랑문화인협의회가 모여 김달진을 기리는 문학상을 만들게 됐다. 시사랑문화인협의회는 우리시와 우리문화를 사랑하고 생활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시민들이 건전한 정서를 함양하고 투철한 민족 정신과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협의회이다. 현재까지도 시사랑문화인협의회는 김달진문학상을 주최하고 김달진문학관을 위탁 받아 운영 중에 있다. 

시사랑문인협의회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진해출신의 김달진을 기리기 위해 문학상을 제정했는데 제정 취지로 “사회 격동기의 혼란상을 빌미로 세속화의 길을 방임해 온 우리 시사에서 인간이 구현해야 할 정신주의 영역을 일관되게 추구했던 월하 김달진 선생의 시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 된 것”이라 밝혔다.

김달진문학상 수상자 모습. (사진: 정민구 기자)
김달진문학상 수상자 모습. (사진: 정민구 기자)

이렇게 만들어진 김달진문학상은 매년 4월 초 역대 김달진문학상 수상자들로 구성된 추천위원으로부터 추천된 작품집을 대상으로 심사위원회의 합동 심사회의에서 수상자를 결정한다. 이성모 관장은 “김달진의 문학 세계는 서정시학 중에서도 정신주의 서정시학이다. 이 같은 월하의 문학세계관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시인들에게 상이 주어지는데 이 같은 가치관은 상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 없이 유지되어오고 있다.”며 “공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어져온 이 상은 처음 만들어져 상금이 없을 때나 33회 째 이어져오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정시를 쓰는 대표 작가들을 배출해낸 지금도 시인들이 받고 싶어하는 문학상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또한, 월하 김달진을 기리는 역할로 김달진문학상과 더불어 꼽는 것은 ‘김달진문학제’다. 95년 경남도 문인과 학술자들이 모여 결성한 김달진문학제전위원회는 김달진을 학술적으로 더 높이 계승하고 연구하기 위해 김달진문학제를 1996년에 처음으로 개최했다. 

이승모 관장은 “문학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문학심포지움’이었다. 문학계에서 쟁쟁한 작가와 교수 등을 초청해 김달진에 대한 발제를 듣고 토론했다. 특히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였던 고 김윤식 문학평론가가 ‘김달진은 한국문학사에서 온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를 계기로 김달진 시인이 한국 현대시사에서 왜 이사람이 있어야하는지 그 이유가 정립이 되었다”며 문학제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지역 출신 문인을 기릴 때 문학제와 학술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김달진문학상과 김달진문학제를 진행하고 나서 발간하는 심사평가집과 자료집은 20~30년간 이어온 세월동안 귀중한 자료로 남게됐다. 이승모 관장은 “문학상과 문학제를 치르고 책 한 권 나오지 않는건 문학상과 문학제를 제대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 어렵게 치른 문학상과 문학제의 흔적을 남겨 참여하지 못한 주민과 학자들에게도 자료로 가치가 있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관 직원들은 모두가 ‘문화기획자’
이승모 관장 “월하의 문학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수 있도록 늘 고민해야”

제30회 김달진문학상 시상식 모습. (사진: 김달진문학관)
제30회 김달진문학상 시상식 모습. (사진: 김달진문학관)

김달진문학관에는 김달진에 관한 모든 면모를 시간순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인, 교육자, 한학자,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까지 그의 인생을 아울러 살펴볼 수 있게 전시를 마련해놓았다. 동시에 월하가 살아온 일생 순서대로 어떤 작품을 작시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김달진 생가 조성도 과거에 주변에 살던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받아 정확히 구현해냈는데 마당에 식재되어 있는 단감나무, 푸조나무, 참죽나무 등은 생가의 멋스러움을 더해주었다.

이성모 관장은 “지난 세월동안 김달진에 푹 빠져 살아왔다. 그의 일대기를 만들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사실이 없도록 월하에 관련된 자료가 있다면 달려가서 팩트체킹하기도 했다”며 이 같이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문학관 직원들은 전부 문화기획자로 향후에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이처럼 김달진문학관은 김달진이라는 콘텐츠를 토대로 김달진 생가 방문, 월하 전국백일장, 청소년 시낭송대회, 동화구연대회, 지역문화예술인 초청을 통한 문예행사 등을 열었다. 특히 월하 전국백일장대회 같은 경우 김달진의 교육자로서의 삶을 대회에 녹여냈다. 단순히 대회만 하고 수상작 발표만 하는 게 아니라 청소년들이 낸 시를 첨삭하여 모두가 배움을 얻어갈 수 있도록 백일장을 열었다.

이성모 관장은 김달진문학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문화기획자로서 매년 다채로운 행사를 열고 기획을 하며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월하 김달진 생가 복원 모습. (사진: 정민구 기자)
월하 김달진 생가 복원 모습. (사진: 정민구 기자)

이에 이성모 관장은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운영에 대해서도 “이호철 선생하면 분단문학과 민주화 운동 시기에 투옥되시던 사건 등으로 문학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분"이라며 “그렇지만 이호철 작가는 현대작가이기 때문에 수많은 연구가 미진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김달진문학제와 같이 연구자들이 이호철을 연구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성모 관장은 “또 분단문학의 거장이기 때문에 그 특징을 살려서 은평구 또는 서울시, 경기도 북부 등에 거주하고 이산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모집해 구술대회를 여는 것도 좋은 콘텐츠가 될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 같은 첨언을 한 이유에 대해 이 관장은 “지역에서 만든 문학상을 지역민들이 사랑하지 않으면 문학상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호철과 관련된 콘텐츠에 지역민들을 계속해서 출연 시켜야만 한다. 이를 통해 은평하면 분단과 통일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를 수 있도록 하면서 동시에 지역주민들이 이호철 작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사랑받는 문학상을 만들게 되었을 때 그래야 건강한 지역 문학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달진문학관의 경우 시사랑문화인협의회가 창원시에서 민간위탁을 받아 운영중에 있는데 관의 간섭으로 문학관 운영에 어려움이 없냐는 질의에 대해 이성모 관장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팔 길이의 원칙'을 잘 살려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모 관장은 “‘팔 길이의 원칙’이라는 게 있다. 공공지원 정책 시행에서 기준 중 하나로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즉,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공공에서 지원은 하지만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취지다. 창원시에서는 이 원칙을 잘 살려 문학관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김달진문학상, 김달진문학제, 김달진문학관의 역할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잊혀지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할 뻔 했던 월하를 한국 문단 역사에서 조명받게 만들고, 그의 가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지역문화 저변을 넓혔기 때문이다. 문인의 가치를 키워내고 학계가 문인을 연구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하는 게 ‘문학상'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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