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제주도를 처음 갔을 때 비행기도 처음 탔다. 30년도 더 된 일이다. 3월이었는데 바람이 많이 불고 비까지 흩날려 추웠다. 성산 일출봉에서는 삼발이가 바람에 넘어져 달고 있던 조명기가 부서지기도 했다. 서귀포 언덕빼기 빼곡한 돌담길을 걷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때 맛본 금귤은 얼마나 달고 향기로웠던가! 그 이후로도 십 수차례 제주를 다녀왔지만 이번처럼 11월은 처음이다. 제주의 11월은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 곳곳에 파릇파릇한 식물이 즐비하다.

많다. 김포공항 제주행 손님. 주말이라 더 그러겠지 싶었는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이 즈음은 평일에도 북적거린단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20분이나 지연 출발-비행기 바퀴를 교체한다면서-했다. 이번 제주행은 느긋한 일정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일주일 살기, 한달살기, 일년살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내다보는 풍경은 편안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색은 뭘까? 샛노란 유채, 가파도의 청보리, 서귀포의 푸른 바다, 파릇한 상록수…. 그 중 필자는 제주의 검은 현무암이 먼저다. 숭숭 보이는 구멍은 궁핍한 옛 제주 사람들의 삶인 듯, 해녀의 검게 닳은 잠수복과 겹친다. 더불어 살육을 피해 어두운 동굴에 숨어 있었던 수많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제주에는 여전히 집과 밭과 목초지를 둘러싼 돌담이 많다. 그러나 3년 전보다 눈에 띄게 현대식 주택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은 탓인지 돌담보다는 흰색 건물들이 시선을 자로 잡는다.

동거문이오름 정상에서 본 원형분화구 (사진 : 장우원)
동거문이오름 정상에서 본 원형분화구 (사진 : 장우원)

제주에는 360여 개의 오름 중 이번에 찾은 곳은 동거문이오름. 한라산과 성산포 중간 지점에 있다. 한라산 방향에서는 일반 산처럼 피라미드형 봉우리가 보인다. 이 봉우리 안쪽으로 말굽형 분화구가 있고 올라가면 꼭대기가 두 개다. 성산 방향으로 원형 분화구가 두 개 더 보인다. 표지판의 설명으로는 다른 오름과 달리 복잡한 형태로 이루어진 게 큰 특징이다.

지금은 분화구 안팎으로 잡목이 크게 자라 위험하지 않으나 그전에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걷기 무서웠다고 한다. 한라산 어느 오름이나 그렇듯 여기서도 한라산이 보인다. 북동쪽으로는 다랑쉬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부근에 11명이 토벌군이 피운 연기에 그을려 질식사한 다랑쉬굴을 어림잡을 수 있다. 1124번 도로를 사이에 둔 백약이오름에 주차를 하고 30여 분 걸어야 한다. 제주 사는 사람들만 주로 찾고, 필자 같은 관광객은 보지 못했다. 유명한 오름들은 사람 구경이 먼저일 듯하다. 차를 타고 지나며 본 새별오름은 멀리서도 인파가 오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큰엉, 올레5코스에 있는 한반도 숲길 (사진 : 장우원)
큰엉, 올레5코스에 있는 한반도 숲길 (사진 : 장우원)

제주는 제일 먼저 걷기 열풍을 일으킨 곳이다. 이름하여 제주올레길. 총연장 425km, 26개 구간이 있다. 이 올레길을 본따 지리산둘레길부터 한양도성길 등 수많은 길들이 생겨났다. 일본 큐슈에서도 ‘큐슈올레’로 벤치마킹까지 했다. 종교적인 의미만 뺀다면 스페인 순례길보다 제주올레가 백번 낫다는데 필자는 아직 비교할 처지가 아니다.

저 멀리 돌고래 모습이 보인다 (사진 : 장우원)
저 멀리 돌고래 모습이 보인다 (사진 : 장우원)

아무튼 잠깐씩 맛본 제주올레는 가장 제주다운 맛과 멋을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싶다. 특히 용수올레 12코스 중 차귀항을 지나 수월봉 너머까지 해안을 걷다 보면 돌고래 떼를 만나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필자는 오후 3~4시 사이 두 번이나 동쪽으로 가는 돌고래를 보았다. 해안에서 가깝게 지나가기 때문에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하다. 가파도올레는 4~5월에 청보리가 장관이다. 바람을 좋아한다면, 바람을 맞으며 원 없이 걷고 싶다면 마라도올레가 제격이다.

5월 한라산 백록담 (사진 : 장우원)
5월 한라산 백록담 (사진 : 장우원)

한라산은 누가 무어라 해도 제주의 백미다. 백록담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그 넓은 품에 드는 일은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어승생, 석굴암, 관음사, 성판악, 어리목, 영실, 돈내코 탐방로가 있다. 이 중 백록담은 성판악~관음사 구간만 개방되었다. 모두 당일에 산행을 끝내야 한다.

성판악에서 출발하면 12시 전에 진달래대피소를 통과해야 하고 관음사 코스는 1시 전에 삼각산대피소를 통과해야 한다. 그 후로는 입산 금지. 오르는 시간은 대략 5시간 내외. 관음사 코스가 약간 짧으나 경사가 급하고 계단이 많다.

백록담 산행은 미리 예약신청을 해야 한다. (https://visithalla.jeju.go.kr)

이번 여행에서 한라산은 오르지 않았다. 제주 시내에서 서귀포로 가다 본 것으로 만족했다. 눈이 뒤덮인 한라산 정상에 따뜻한 노을빛이 감도는 모습은 절로 감탄을 나오게 했다. 또한 새벽, 숙소에서 바라 본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던가. 새벽 어스름에 희미하게 드러난 한라산 정상과 양쪽으로 완만히 흐르는 능선은 또 얼마나 가슴 벅찼는지 모르겠다.

제주는 관광 상품이 많은 곳이다. 놀이시설과 유희시설은 물론이고 체험장과 박물관도 여러 곳이 있다. 자연경관만으로도 제주를 찾은 보람이 차고 넘치겠지만 역사 유적과 함께 즐길 거리도 일정에 잡아보면 좋겠다. 서귀포매일올레 시장은 먹거리와 제주특산품을 찾는 사람으로 발디딜 틈이 없다. 5층짜리 주차장은 30분 무료. 드나드는 길이 좁고 행인이 많으니 특히 운전에 주의해야 한다. 이곳저곳 잘 비교해서 발품을 팔다 보면 흡족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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