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상처는 시대의 아픔과 겹쳤다.

그 사람이 궁금했습니다. 하얀 국화 꽃송이에 묻혀 옅은 웃음 짓고 있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기만 한 사내. 손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국화꽃 한 송이를 고인의 제단에 힘겹게 올리며 누군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허공만 바라보던 그 사내. 전 국회의원 김홍일이었습니다.
 
검은 치마저고리에 흰 리본을 머리에 꽂고도 차마 남편을 보낼 수 없어 고개 들지 못하는 어머니의 슬픈 어깨를 쓸어주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하는 가족들의 가슴을 안아주지도 못한 채 비둘기 속살 같이 흰 머리카락의 무게조차 버거운 듯 겨우 고개만 들고 있던 그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이었습니다.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90년대부터 서서히 진행되던 병이 그가 의원직을 잃고 언론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난 2006년 즈음에는 급속히 진행 되어 그를 휠체어에 주저앉힌 것입니다. 언론은 그가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두 번의 옥고를 치루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몹쓸 병을 얻었다는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희호 여사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 고문의 와중에도 혐의를 허위로 자백하지 않기 위해 홍일 씨가 자살기도까지 했었다고 자서전에서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사람을 잃은 슬픔도 컸지만 자신의 생명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죽음에도 통곡으로 답하지 못하는 백치가 된 아들의 눈빛은 국장(國葬)기간 내내 더 큰 슬픔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야만의 시대 고문의 잔혹사를 증명하는 표식이 되어 이 쓸쓸한 역사를 향해 거칠게 항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에 애도를 표하는 시민들   © 윤정현
마취 없는 외과 수술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학살로 들어선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 20여명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학살의 책임을 민주인사에게 돌리고 그 중 김대중을 수괴로 낙인찍어 결국 대법원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됩니다.
 
그 사건에 관련된 이들은 예외 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거꾸로 매달려 물 몇 양동이를 마시는 건 기본이고 갖가지 고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수사관을 엄마라 부르기도 했으며 고문 수사관이 지치거나 진술서를 쓸 때를 제외하고는 조사기간 내내 심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 즈음 광주시민 학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돌리다 붙잡힌 시인 황지우는 자신이 당한 고문을 ‘마취 없는 외과수술’이라고 했습니다. “거꾸로 매달린 내 몸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찌할 수 없는 짐승소리가 났다. 죽을 수 있는 희망조차 없던 그곳에서 고문의 효과는 견딜 수 없는 자기 혐오감이었다. 나는 그 혐오감을 기본 정서로 80년대를 살았다. 죽을 수도 살수도 없었던 시절에 나는 견딜 수 없어서 시를 썼다.”(나의작품 나의 얘기-흉측한 삶 80년대 고문체험 중)
 
그의 고백에서 묻어나는 절절한 아픔을 짐작할 길은 없지만 나는 2006년 남영동 평화 인권센터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번 들어가면 모두가 간첩이 되어서야 나올 수 있었던 남영동 대공 분실의 구조를 보고 놀랐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건축은 빛과 벽돌로 짓는 시”라고 읊었던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서 지어진 이 건물은 거짓을 진실로 자백받기 위한 오직 고문의 용도로만 만들어졌습니다.
 
50센티미터가 족히 넘는 두께의 대문을 넘으면 피의자들이 출입했던 건물 뒤편의 조그만 문이 나옵니다. 두 눈을 가린 피의자들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철컹’ 대는 철문이 닫히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수십 바퀴쯤 돌아 5층 조사실에 도착할 때는 모든 피의자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곧이어 닥칠 끔찍한 상상을 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민주당 고문 김근태는 수사관의 발밑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박종철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반국가 단체의 조직사건이 만들어 졌고 납북어부와 조국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재일교포 학생들도 간첩이 되었습니다.
 
▲     © 출처: www.poet.or.kr/pcm
그대는 아직도 잠자는 돌

 
살인적 고문이 민주화 인사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자신들의 집권에 반대하는 조그만 틈새조차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는” 애국자만이 살 수 있었던 그 시대에는 신문 연재소설의 삐딱한 한구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서면 다 잊을 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고 들어 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 세상에 남자 놈 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작가 한수산은 1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중앙일보에 연재 해왔던 소설 <욕망의 거리>에 삽입된 단 두 구절 때문에 1981년 5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책 한권으로는 다 쓰지 못할 고문을 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장단지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주리를 트는 고문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 씌우고 고춧가루 물을 퍼붓는 고문 열 손가락에 전선을 묶어놓고 스위치를 올리는 전기고문까지. 이미 널리 알려진 한수산 필화 사건의 개요입니다.
 
산문시에 가깝게 유려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작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절필을 선언했고 그를 고문했던 노태우(당시 보안사령관)가 대통령이 된 1988년 고국을 등지게 됩니다.
 
이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던 7명중에는 고독한 술꾼 서정을 사랑한 시인 박정만이 있습니다. 소설가 김성동의 표현대로 그는 기갈지옥에서나 온 것처럼 액체로 된 것이라면 하다못해 농약까지도 마시고 싶어 했던 술꾼 이었습니다.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중략-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 모양으로.(잠자는 돌 박정만 시)
 
술을 사랑했던 만큼 인간의 묻어둔 감성을 사랑했던 한국 서정시의 별은 한수산과 함께 끌려갔던 3박 4일이 지난 후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 남은 흐느적거리는 연기처럼 자신을 버렸습니다. 직장을 잡지도 못했고 가정을 원만히 꾸리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혹독한 고초를 겪은 이유를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말이 죽고 침묵만 살아 더 큰 침묵이 되었던 살기어린 시절의 저녁이면 그는 어김없이 술에 취했고 술에 취하면 누구든 붙잡고 물었습니다. “내가 왜 그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를 제발 알려 달라”고.
 
한수산과 같은 대학을 나왔고 책 출판 관계로 몇 번 만났던 이유로 보안사에 끌려간 한국의 마지막 서정시인 박정만은 고문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88올림픽 폐막식이 열리던 10월 2일 오후 봉천동 그의 집 화장실에서 고작 마흔 셋의 나이에 ‘잠자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의 임종을 지킨 것은 그가 죽기 전 시마(詩魔)에 들어 초인적인 힘으로 옮겨 적은 300여 편의 시 뭉치뿐이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은 민주화 운동가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임을 강조했었다고 합니다. 야만의 시대에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야만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독백으로 읽힙니다.
 
그가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싶다 
 
인권연대 운영위원회가 끝나고 뒷풀이를 하는 지난해 가을 밤 늦은 시간 함께 있던 오창익 사무국장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가을 저녁에 취해 거나하게 술을 마신 그의 지인이 경찰과 시비가 붙어 공무집행 방해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부랴부랴 경찰서에 찾아간 그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신을 끌고 온 경찰에게 항의 했다는 이유로 그의 지인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소한 이유라도 경찰의 권위에 도전 하는 시민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입니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MB시대 인권의 시계가 얼마나 거꾸로 돌아갔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30년 전 군사정권이 했던 일중 ‘고문 빼고는 이 정부가 다 하는 것 같다’는 한 인권변호사의 넋두리는 이제는 고문도 할 것 같다는 우려가 되고 곧 현실이 될지도 모릅니다.
 
생전에 고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노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신이 더 괴로울 거라고도 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 씨는 전직들이 가장 편했을 때가 국민의 정부 시절이었다는 덕담(?)도 했습니다.
 
전두환 씨가 서거하신 아버지의 영전에 꽃을 바쳤을 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김홍일 전  의원의 심정은 어땠을까를 생각합니다. “죽음의 고통은 주되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식은 주지 않았던(황지우 윗글)” 고문자의 환영을 그의 시선은 쫓아가지도 못하고 사지는 굳을 대로 굳어 고문자의 멱살잡이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데도 과연 김홍일은 전두환을 용서할 수 있을까.
 
국장 기간 내내 비친 그의 모습에서 원귀처럼 되살아나는 고문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부모 잃은 슬픔을 꺼이꺼이 우는 그의 목소리라도 들었으면 부리부리 했던 큰 눈으로 쏟아내는 눈물이라도 보았으면 마음이 이리 착잡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김홍일 전 의원 그가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다시 일어나 고문으로 얼룩진 이 잔혹한 역사 위에 회한의 곡소리 한번 크게 우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화해와 용서 사회통합의 메시지를 강조한 고문자들의 레토릭은 해원(解怨)의 통곡이 끝난 뒤에 논해도 좋을 듯 합니다.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시민칼럼은 시민 필자 기고 글입니다. <은평시민신문>의 편집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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