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잘 모르지만 한 때 축구에 푹 빠져 지낸 일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바로 2002년 월드컵 때다. 선수들 이름도 낯설고 경기규칙도 잘 몰라서 연장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골든골을 넣은 모습을 보고도 경기는 언제 끝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선수들도 빛났지만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은 더욱 빛났다.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거미줄 같은 인맥을 형성한 축구계에서 오직 선수들의 기량과 가능성을 보고 팀을 이끄는 모습은 우리사회가 얼마나 실력보다는 인맥이 중요한 사회인지 되돌아보게 했다. 그런 이유로 히딩크 감독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이 되었다. 

인맥보다 실력을, 공정한 사회를 위한 시도는 1980년 독일에서도 있었다. 뮌헨 오케스트라 단원을 뽑는 오디션이 진행됐는데 지원자들은 심사위원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 사람씩 장막 뒤로 가서 연주했다. 블라인드 오디션을 진행한 것으로 당시에도 이런 오디션은 드문 일이었다. 

16번째 지원자로 나선 아비 코난트는 조용히 트롬본을 연주했다. 연주도중 한 음을 실수했고 코난트는 이번 오디션도 통과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집에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코난트의 연주에 넋을 잃었다. 한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연주 실력이 최상급임을 알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코난트 다음으로 오디션을 기다리던 나머지 17명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장막을 걷어냈다. 

심사위원들은 코난트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당연히 남자일거라고 생각했던 연주자가 여자였다. 코난트의 연주는 트롬본은 절대 여자가 연주할 악기라고 생각했던 당시 심사위원들의 생각을 단박에 바꿔버렸다. 

최근 한 언론사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가치는 ‘공정·정의’였고 ‘평등, 상생·협력, 자유’가 그 뒤를 이었다. 우리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답은 70%에 달했으며 주요사안이 결정될 때 혈연·지연·학연 등의 연고가 작용한다고 답했다. 13일 경기연구원이 밝힌 조사결과도 비슷하다. 응답자의 73%가 우리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으며 ‘기회가 공정하게 부여된다’는 답변은 학력과 소득이 낮을수록 낮게 나타났다. 

만약 히딩크 감독이 개개인 선수 기량보다는 축구계 인맥에 맞게 선수를 기용했더라면 월드컵의 기적이 있었을까? 뮌헨 오케스트라가 블라인드 오디션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비 코난트라는 뛰어난 음악가를 만날 수 있었을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패밀리를 강조하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보스를 중심으로 뭉칠수록 공정한 사회는 멀어져간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따지며 관계를 맺을수록 그 테두리 밖의 사람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 중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고 하고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걸 탓하는 무력감이 팽배할 때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이라는 말은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떠나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안타깝게도 그 희망은 날이 갈수록 절망으로 바뀌고 있다. 공정한 사회가 펼쳐지길 기대했던 많은 시민들은 여전히 혈연·지연·학연의 선후배 서열이 지배하는 사회, 공정하지 않은 사회를 목도하고 있다. 비판이 자유롭지 못한 사회, 원칙이 없어지는 사회는 풀뿌리 민주주의 정치를 심하게 훼손시킬 수밖에 없다.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연대와 협동이라는 가치가 아닌 특정한 이들의 결탁과 다른 집단을 배제하는 그들만의 혈연·지연·학연 관계는 공정한 사회를 가로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인들의 홍보문자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진다. 오는 4월 15일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후보로 나선 이들은 저마다 자신을 홍보하기에 바쁘다. 그 홍보가 혈연·지연·학연을 강조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닌 이 시대에 필요한 정책 과제를 제시하고 함께 고민하는 축제의 장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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