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왕진을 자주 나갑니다. 그래서인지 전에 없이 죽음을 앞둔 분들을 많이 뵙게 됩니다. 전공의(레지던트) 시절 자주 사망선언을 하고 사망진단서를 썼던 것에 비하여, 동네 의사로 살아왔던 지난 몇 년 동안에는 죽음이 아주 가깝지는 않았습니다. 동네 주민분들, 친구들의 부모님 장례식에서 마주치는 정도였지요. 제가 돌보던 분들이 돌아가셔서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일들은 동네 주치의로서는 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최근 왕진 시범사업에 참여하면서 왕진을 다니기 시작하니, 동네 구석구석 집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분들이 많음을 새삼 느낍니다.

제가 찾아뵙는 많은 분들이 집에서 죽고 싶다는 얘기를 하십니다. 혹은 당사자가 직접 말하지 못할 경우 가족들이 “원래 병원에 입원하고 싶지 않아 하셨어요. 항상 내 집에서 죽고 싶다고 하셨어요.”라고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사로서, 죽음 준비를 도우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좀 더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같이 즐거워했던 것이 인생의 낙이었고 의사로서의 보람이라고 느껴왔는데 점점 죽음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더 좋아지려면 현대의학이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한계 없이 생각하고 밀고 나가도록 훈련받았으나, 잘 돌아가시도록 하기 위해 어디까지 의료인들이 개입해야 하고 어디서부터는 순리대로 두어야 하는지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언제쯤 돌아가시게 될지 예견하는 일부터가 감이 잡히지 않고 무엇이 순리인지도 영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집에서 죽고 싶다’고 한 말씀이야말로 이제와 가장 큰 바람일 텐데 그것을 향해 방향타를 잡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기준점이 됩니다.

집에서 돌아가실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사망진단서이지요. 사망진단서는 말 그대로 사망‘진단서’입니다. 왜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정확한 병명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진단서이니 당연히 의사(치과의사, 한의사 포함)만이 작성할 수 있고, 의사라 하더라도 사인을 알 수 없는 의사는 쓸 수 없습니다. 입원 기간 중 진료를 맡았던 의사, 최소한 같은 의료기관에 일을 하고 있어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진료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의사가 작성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병원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면 쓸 방법이 없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망이 근시일 내에 예견되는 질환의 경우 (말기 암, 중증의 간경화 등) 사망시각으로부터 48시간 이내에 그 질환에 대해서 (사망을 예견하면서) 진료를 했던 의사는 해당 질환을 사인으로 하는 사망진단서를 쓸 수가 있습니다. 즉 이론적으로는 2일에 한 번씩 왕진을 나가면, 저도 집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사망진단서를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기의 암으로 왕진을 신청한 분들을 만나러 갑니다. 아직 가정 왕진이 온전히 홍보되고 자리 잡은 게 아닌데도, 2020년 이제야 막 시작한 시범적인 제도인데도, 이 정도의 신청이 들어오는 걸 보니 우리 동네에 정말 많은 필요가 숨어있었나 봅니다. 

어렸을 때 살던 아파트에서 초상이 났던 날, 어머니가 “우리 아파트에서 지난달에 아기도 태어났고 오늘 초상도 났으니, 이제 여기가 진짜 집이네, 진짜 집이야.”라고 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진짜’ 동네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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