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무원이 계수조정 회의실 문틈 사이로 나오는 의원들의 심의 내용을 듣고 있는 모습.

지난 11일과 12일 무박 2일로 치러진 2020년도 은평구청 예산 계수조정은 개청 40주년 역사상 가장 길게 진행됐다. 구청 공무원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의원들의 1차 예산 삭감 요청액은 113억 원에 달했다. 참여예산사업, 청년 일자리 사업 등 전액삭감 요청이 많았다. 예산 조정 소문을 듣고 우려하는 주민들이 구의회를 찾아오기도 했고, SNS에서는 예산 삭감을 염려하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한해 예산을 갖고 사업을 해야 하는 공무원들의 입장도 다르지 않았다. 예산 조정을 위해 12시간을 기다린 공무원도 있었다. 관행상 계수조정은 비공개로 진행되다 보니 회의 과정을 듣고 싶어 하는 공무원들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의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대고 심의과정을 들었다. 문틈으로 나오는 목소리를 들어야 하기에 복도는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침묵을 유지해야만 했다. 예산 조정에 대한 우려는 주민이나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수조정은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부처 간 예산 과목의 계수를 증감하는 것으로, 실질적이고 최종적인 예산안 심사 단계다. 그러나 계수조정 회의는 법적 근거도 없이 비공개로 이뤄지고 있다. 속기록이나 녹음 기록도 없어 조정 과정에서 의원들 간에 고성이 오가기도 하며, 한 입으로 두 말을 해도 증거가 없어 의원들 간 분쟁이 발생하는 일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공무원은 본인의 업무이기 때문에 예산 조정 이유를 어깨 너머라도 알 방법이 있다. 그렇지만 주민들의 사정은 다르다. 새로운 사업이 생기거나 예산이 증액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던 주민들이 ‘전액 삭감’이라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다. 계수조정을 통해 최종 삭감 되어도 이유를 알 수도, 알 방법도, 알려줄 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치러지는 예산 심의에서 의회의 계수조정은 많은 이들에게 의문을 남기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계수조정이 비공개로 진행되는 이유는 의원들의 예산 심의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보장해야한다는 논리 때문이다. 계수조정 과정이 공개될 경우 지역사회의 특성상 민감한 예산을 조정하는 데 있어 이해관계자들의 반발 등으로 의원들이 소신을 펴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예결특위 계수조정에서 이뤄진 예산 증·감액이 기준이 모호하고, 의원들이 사업에 대한 인지나 예산에 대한 이해 없이 개인 생각을 바탕으로 둔 감액 요구가 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또한 의원들은 예산을 감액한 이후 증액하는 과정에서 사업의 공공성 보다는 개인 관심 분야가 주를 이루는 점은 계수조정이 비공개로 이루어져야 하는 당위성을 스스로 훼손시키는 일이다. 

게다가 예결특위 관계공무원 질의답변에서 의원의 발언과 계수조정에서 이루어진 증·감액 요청이 일관성이 없다는 점, 전임 구청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예산 조정 등은 더 이상 계수조정을 비공개로 진행해야할 명분이 없어 보인다.

2000년 헌법재판소는 국회 예결특위 계수조정소위원회가 시민의 방청을 불허한 것에 대해 법률적 근거 없는 자의적인 처분으로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알 권리인 국회 방청권이 침해되었다고 결정한 바 있다. 당시 헌재는 의사공개원칙이라는 헌법 원칙이 국민에 의한 의정활동의 감시와 비판을 가능케 하는 데 있음을 강조했다. 위헌 결정 이후 국회는 계수조정소위 회의 속기록을 공개하고 있으며, 올해 초 서울시의회도 계수조정 회의 공개를 약속하는 대열에 합류 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해왔다는 관행을 구실로 삼아 주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지방의회는 여전히 많고, 은평구의회도 그 중 하나에 속한다.

예산 심의는 의회가 가진 고유 권한이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대표성을 가진 의원들이 예산을 심의하고 집행부를 감시하는 권한은 독립적이어야 하고 공공성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신뢰 받는 의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권위주의적 권한을 넘어 신뢰받는 의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계수조정의 성역화를 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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