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체 게바라를 찾아 떠난 여정

체 게바라 하면 역시 혁명의 아이콘이다. 생전의 체 게바라 사진.

체 게바라(또는 ‘체’). 역사 다큐멘터리의 흑백 영상으로 가끔 등장하는 쿠바사람으로 알고 있었다.공산주의를 연상케 하는 별 모자를 쓰고 시가 담배를 물고 있는 그의 모습을 프린팅한 티셔츠를 서울거리에서 본 적도 있다. ‘체’가 혁명과업 대상으로 삼은 자본주의 심장부인 미국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티셔츠는 스테디셀러다.

쿠바. 공산주의, 시가. 티셔츠.

이 정도가 필자가 볼리비아 오기 전 그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남미 볼리비아에 체류한 이래 체 게바라 프린트 셔츠가 눈에 자주 밟혔다. 호기심이 발동해 조사해보니 체가 생을 마감한 마지막 전투지가 이곳 볼리비아란다. 한 때 미국을 등에 업고 체와 격돌한 볼리비아 정부는 운명의 장난일까, 현재 미국 대사를 내쫓은 몇 안 되는 반미국가다.

그의 생애에 호기심이 생겼다. 쿠바 2인자였던 체는 무슨 연유로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남미에서도 가장 못사는 이 고산 지역까지 왔을까. 마침 주말과 볼리비아 공휴일(카니발)이 겹쳐 시간이 확보됐다. 그의 마지막 여정을 밟기로 결정했다.

체 게바라 자서전을 훑어보니 혁명가 체는 반제국주의 혁명을 달성할 남미 요새로 현재 볼리비아 내 가장 번성한 경제 지역인 산타크루즈 주의 바예 그란데(Valle Grande) 고산지역을 선택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물이다 보니 쿠바에서 대머리로 위장하고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에 잠입해 육로를 통해 코차밤바 주(필자 거주지)를 거쳐 산타크루즈 주로 넘어갔다. 그 후 볼리비아 정부군과 수많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대치했고 라 게이라(La Gueira) 지역의 초등학교 시설에서 손발이 묶인 채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필자의 여행은 그 루트를 고스란히 답사하는 것이다.

거리의 체 게바라 벽화.

그를 만나다

코차밤바에서 바예 그란데까지 육로 이동하는데 꼬박 9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거리에 비해 오래 걸렸다. 체가 이동한 1960년대는 얼마나 더 열악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바예 그란데에 도착하니 그의 주요 활동지답게 여기저기 체 게바라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시 소속 가이드 안내에 따라 체의 시신이 언론에 첫 공개된 병원 세탁소, 동료 게릴라들의 추모 무덤, 현 볼리비아 대통령이 지원ㆍ건설한 체 게바라 기념관 (* 이곳은 시신 매장 장소로 체 게바라 시신은 1997년 쿠바로 이장됐다)을 둘러봤다. 

전시장에 진열된 그의 과거 사진과 메모, 유품을 살펴봤다. 체는 어릴 때부터 용모가 출중했다. 게다가 의사였다. 세상에! 흡사 살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훤칠한 이 젊은이가 메스 대신 총을 들고 반제국주에 맞서는 선봉장이 되었다니. 유년시절부터 사망할 때까지 체의 초상화를 훑었다. 가이드가 들려준 체의 삶은 반전 그 자체였다.

노벨문학상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프랑스 철학자)는 체를 인터뷰한 후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묘사했다. 혁명가이기에 앞서 인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그에게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따위의 이데올로기로 그를 묘사할 수 없다고 했다. 체의 죽음을 따라가니 이젠 탄생이 궁금해졌다. 아이패드로 체 게바라 자서전을 다운받았다. 스크롤 내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체 게바라는 1928년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일랜드계 귀족 후손으로 당시 세계경제 상위권에 위치한 부국,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그는 부모가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수차례 이사를 할 정도로 심한 선천적 천식을 앓고 있었다. 의학 공부를 하건 운동을 하건 여행을 가건 천식은 체를 늘 따라다녔는데 심할 때는 반년에 45번의 발작을 겪었다. 

심지어 생사를 건 볼리비아 전투지에서도 천식은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어쩌면 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시간이 있었기에 체 게바라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 불굴의 의지를 다질 수 있던 것일 수도.

체는 신체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즐겼다. 전동자전거(페달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아르헨티나 전역을 누빈 것이 첫 번째. 1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이나 휴학계를 제출하고 다섯 살 많은 손윗사람인 의사 알프레도를 꼬드겨 아르헨티나-칠레-페루-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 이르는 남미 전체를 관통한 것이 두 번째. 대학 졸업 후 의사로 몇 개월 근무하다 역마살이 도드라져 사표 쓰고 여행길 오른 것이 세 번째였다. 

이 마지막 여행에서 체는 남미 페루-볼리비아에서 혁명 동지를 모집 후 중미(과테말라-멕시코)로 넘어가 쿠바 반제국주의 혁명에 가담한다. 체는 스스로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여행을 통해 새 자아를 찾았고 혁명가로 거듭났다.

1951년 당시 23살의 체가 8개월간 남미여행하며 남긴 메모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Notas de Viaje>란 책으로 엮어졌다. 이 기록에서 체 게바라의 여행 방식과 어떤 과정을 거쳐 그 강철 같은 혁명의식이 형성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담한 여행

체는 1950년대 위험천만한 남미 비포장도로를 전동자전거로 하나로 여행했다 그는 이 바이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온갖 사고를 겪었다. “그곳에 가는 동안에도 몸이 두 번 더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하루에 9번의 사고라니.”

수중에 돈이 없어 여행지에서 일자리를 구하며(농사, 채굴, 선원, 여행가이드 등) 여행비를 마련해오던 체는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멘트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철판 깐 방랑객의 면모도 보인다.

“(편지내용 발췌) 우리는 점점 낯이 두꺼워지고 있어요. 야외 취사시설이 있는 집만 보면 무조건 들어가서 태연하게 음식이나 숙소, 다른 무엇이든 부탁해요”,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 왔는데 무척 굶주려 있어요. 뭔가를 먹고 싶습니다.”

때론 무모하기까지 한 그의 여행 스타일이 체가 지닌 대담성의 자양분이 됐음이 자명하다.

도시 곳곳에는 체 게바라의 흔적이 가득하다.

박애주의 여정

체 게바라가 의과대학에 진학한 연유는 그를 가장 귀여워해주시던 할머니가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 초심은 여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체의 버킷리스트에는 페루 쿠스코 고대 유적지인 마추픽추, 와이나픽추 방문뿐 아니라 아마존 상류의 산 파블로 나병 환자촌도 포함돼 있었다. 체는 어느 도시를 방문하든 아픈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알베르토가 의사들을 찾아가는 동안 난 그 가게의 종업원이던 늙은 여자의 천식을 진찰하러 방문했다.”

그의 여행 목적은 명료했다. 남미 실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편지내용 발췌) 나환자촌에서 우린 가운도 입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마치 건강한 사람들을 대하듯이 악수하고 곁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축구도 같이 했어요. 무모한 허세처럼 보일 수 있으나 평소 마치 동물처럼 취급 받던 이들에게 단지 정상인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 주는 심리적 고양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의학도는 남미 국가의 열악한 의료현실과 굶주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서민 노동자)의 삶을 목도했다. 그는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체게바라의 전투지, 라 게이라로 향하는 길목

혁명으로의 길

끝이 없는 배고픔을 겪는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삶을 경험한 체는 공산주의라는 생소한 교리에 눈을 뜬다. 그 교리 본질이 뭐든 간에 ‘가난한 자에게 빵을!’이란 구호야 말로 삶의 의지를 상실한 민중에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 믿었다. 물론 체가 처음부터 혁명의 기치를 든 것은 아니다.

“남미대륙을 지배하는 자들은 백인 침략자들이야.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한테 필요한 건 변혁이 아니라 한 끼의 밥이야.”라며 빈곤 해결을 위해 골머리를 앓으면서 신 혁명 정부의 변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안데스 원주민들의 "토지 분배라는 거 하나마나지 뭐. 내가 일군 땅인데 인정 만해준 게 무슨 토지 분배야?"라는 볼멘 목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체는 모순의 원인을 송두리째 뽑기 위한 총 든 혁명만이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나병 환자들과의 이별 전 고별사에서 편협한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민족적 유사성을 지닌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연대를 소원했다. 남미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가 탄생한 순간이다.

체 게바라가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포박당해 총살당한 볼리비아 산타크루즈 주 라 게이라 지역은 바예 그란데에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길은 아직까지 비포장도로로 볼리비아 유명관광코스임에도 연간 사망자가 나온다는 데스로드(death road) 못지않은 절벽을 끼고 있다. 오지 중의 오지였다. 

볼리비아 정부가 체의 시신을 차량이 아닌 헬기로 운송한 이유가 와 닿았다. 쿠바 2인자로 부귀 명예를 뒤로한 체는 오로지 남미 혁명의 불씨를 피우리라는 일념으로 이곳에 와서 싸웠고 생을 마감했다. 체 게바라 자서전의 역자 박지민은 “라틴아메리카 연방이라는 꿈을 제시한 볼리바르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을 지은 볼리비아에서 삶을 마감했다”며 이를 역사의 아이러니라 묘사했다.

체 게바라는 23살 여행길에서 혁명가의 꿈을 품었고, 31살에 쿠바혁명을 성공시켰으며, 39살에 볼리비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공산주의 탄생의 사상적 기반을 닦은 칼 마르크스(1818~1883, 독일 경제학자ㆍ철학자)는 봉건제 이후 자본주의 모순을 맞닥뜨린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될 것이라 전망했다. 

체 게바라도 그렇게 믿었다. 허나 21세기 승리의 여신은 독재와 빈곤으로 점철된 공산주의에 등을 돌렸고 자본주의에 미소를 띄었다.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요즘 자본주의는 체 게바라 사상에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체 게바라의 혁명 이미지에 주판알을 튕길 뿐이다.

체의 마지막 여정을 밟으며 읽었던 자서전에 감명을 받은 여행자ㆍ독자로서 그의 티셔츠를 곧 구입 예정이다. 그의 생애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필자는 여전히 자본주의 달콤함을 만끽중인 소시민에 불과했다. 

그래서 세계시민에 가장 근접한 삶을 살았던 체를 더 오랫동안 기억하려 한다. 제주 4.3항쟁의 대량학살을 폭로해 한국근대사의 아픔을 세상에 알린 이산하 시인의 추천사가 이 여정의 갈무리로 적격이다.

“그는 마치 대나무 같은 인간으로 보인다. 끝을 뾰족하게 깎으면 날카로운 창이 되고 꼬부리면 유용한 호미가 되고 몸통에 구멍을 뚫으면 아름다운 피리가 되고, 또 안을 비움으로써 더욱 단단해지는 대나무처럼 그런 내공을 가진 인간으로 보인다.  그의 성향은 한두 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을 만큼 다면적이고 다층적이었다. 

마르크스처럼 부르주아를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했던 이중적인 운동가들은 가차 없이 그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혁명적인 종합 예술가였고 종합예술적인 혁명가였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도 선해야 한다"는 순도 100% 평화주의자인 간디를 흔히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순도 100% 반제국주의자인 체 게바라는 '지금 신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산책하면서 제국주의 악마들이 숨통을 죄고 있는 저 세상으로 같이 내려가자고 신을 설득하고 있을 것이다.”

                                     

[참고서적] 
<체 게바라> (유현숙, 열매출판사)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체 게바라, 도서출판 황매) 
<체 게바라 자서전> (체 게바라, 역자 박지민, 도서출판 황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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