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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방 갈 기회? 많았지, 그런데..."[은평, 담소전] - 차철수 어르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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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0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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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 담소전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우리집

지역문화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얽혀 만들어진다. 그 순간을 담은 사진 한 장은 은평생활사를 증언하는 자료집이 된다. <은평, 담소전>은 지역주민의 사진을 통해 은평생활사를 들여다보는 자리로 후원 서울문화재단, 주최 은평문화재단, 주관 은평문화재단, 반짝반짝사진방에서 진행한 지역문화기록사업이다.

훈장과도 같은 세월의 흔적이 깊게 주름 해 있는 차철수 어르신. 그의 표정을 읽으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은평에서 그의 역사가 곧 대한민국의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차철수 어르신은 86년 생애의 거의 대부분인 81년을 은평구에서 보냈다. (사진: 은평문화재단)

“자두밭 집에서 살다” (1938)

서울혁신파크 자리에 불이흥업주식회사라고 일본이 설립한 회사가 있었어. 돼지를 키우는 양돈장이어서 불이농장이라고들 불렀어. 또 개울 건너편, 지금의 여성개발원 자리에 양계장이 있었지. 우리 집이 사 남매였는데, 큰형님이 유명한 부화 기술자였어. 큰형님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양계장 총책임자로 취직했어.

녹번과 불광동 일대가 불이농장 땅이었는데, 양계장, 양돈장, 각종농장까지 운영하니까 이곳 주민들이 많이들 그곳에서 일하며 살았어. 옛날에는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와 불광리였었지. 큰형님이 2년 먼저 자리 잡고 가족들을 불러올렸지. 그때 내 나이가 5살이었어.

지금의 불광동 현대홈타운이 그때는 자두밭이었는데, 거기에 집 두 채 중 한 채에 들어가 살게 되었지. 커서는 둘째 형은 응암동에 집을 지어 살고 나는 체신부 관사에서도 살고 은평에 집을 짓고 살았지.

“포수말 언덕 전쟁의 흔적, 총탄” (1950.6.25.) 

1950년 전쟁나서 안양으로 피난 가려다가 도저히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서, 다시 대조동에 돌아왔어. 돌아와서 죽을 고비 참 많이 넘겼어. 우리 식구가 불광동 국제전신 전화 건설국 사택에 살았는데, 인민군이 먼저 들어와 주둔을 했지.

인민위원회도 못 들어오는 통행금지 구역이었는데 우리 식구는 주민이니까 왕래할 수 있었어. 그때 내 나이가 열 일곱이었는데, 형님 동료 중에 고발자가 있었어. 아직 다 큰 사람이 남아있다고. 내 또래의 젊은 남자들을 인민군으로 끌고 갔거든. 꼼짝 못 하고 대조동 지금의 순복음교회 인근의 인민위원회에 끌려갔어. 가자마자 나보고 임진강 복구대로 가라는 거야.

그 당시 임진강 복구대로 가는 사람한테는 쌀을 3일분 줘서 보내줬어. 그런데 그날은 개성을 오가는 쌀장수들로부터 빼앗은 쌀이 없어서 나보고 집에서 하루 자고 내일 오라는 거야.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끌려가면 죽겠다 싶어서 야반도주했지. 포수말 형님 댁으로 달아나서 그 집 지하에 숨었어.

그날 밤, 수색쪽에서는 탱크 소리가 나고 유엔군이 매바위 경계에서 녹번동 쪽으로 기관총 걸어놓고 일체 출입금지를 했는데, 이렇게 있다가는 죽겠다 싶어서 식구들 다 흰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뒤집어쓴 채로, 매바위로 밤에 도망갔지.

다행히 유엔군이 우리를 보고 총을 쏘지 않아서 무사히 건너갔어. 그다음 날부터 유엔군이 막 진격해 올라가서 살게 되었어. 집에 돌아오니 교전으로 집 여기저기 총탄이 많이 박혀있더라고. 그 때 인민군한테 끌려갔으면 임진강에서 죽었을 거야. 고난의 계절이었어.

어렵사리 한강 다리를 건넜는데 그날 밤 한강 다리가 폭파되더라고. 내가 머리도 다 밀었지 키도 크지 행색만 보고 군인들이 인민군으로 의심하고 나를 잡아 느티나무 앞에 세우고 총을 쏘려고 하더라고. 때마침 같이 피난 오던 음악 선생님이 우리 학생이라고 설명해줘서 살았어. 매 순간이 죽을 고비였어. 그렇게 안양으로 피난을 가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다시 올라와, 서울 수복되고 나서야 입대를 했지. 1950년에 입대해서 휴전 후 제대하고 귀가했어.

1954년, 군 제대 직후의 차철수 어르신 사진.

“집을 짓고 은평을 즐기다” (1950년대~1960년대) 

아버지께서는 은평면에 첫 번째로 지어진 응암교회의 재건축을 위한 건축 위원장으로 교회건축에 발벗고 나섰지. 그무렵 교회 어르신들 주선으로 행주교회 장로님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어.

결혼하고 독립해 우뭇골(현재 은평뉴타운)에 판잣집을 직접 지어 살았어. 그 후로도 여러 채를 은평구에 짓고 살았지. 월남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불광동에서 오토바이센터를 하는 형님을 따라 새동리(지금의 녹번역과 은평구청 사이)에서 서부오토바이상사를 했어.

그때는 식구들과 독박골(지금의 구기터널 근처)로 놀러 많이 갔는데 불이농장 뚝을 막아서 물이 얼마나 깨끗했다고. 개울가에 올라가서 돌을 굴리면 가제가 돌 사이에 우글우글했어. 겨울에는 물 채워서 썰매치고, 얼음 잘라서 빙고에 저장했어. 여름에 소젖 짜면 빙고에 보관했다가 시내로 반출했었지.

1960년대, 차철수 할아버지는 서부오토바이상사를 운영했다.

“나의 고향, 나의 생활 터전” 

다른 지방으로 갈 기회들이 많았어. 그런데 다 떨쳐버리고 갈 수 없더라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섬기고 나 자신도 교회 건축에 전력을 기울였던 응암교회가 이 곳에 있었으니, 형님들과 살아온 세월을 어떻게 버리나 싶었지. 은평구 속에 내 삶이 완전히 동화된 거야. 정이 두터워서기도 하고. 죽는 날까지 은평에서 살다가 갈 작정이야. 고향에서 살고나는 거지.

지역문화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얽혀 만들어진다. 그 순간을 담은 사진 한 장은 은평생활사를 증언하는 자료집이 된다. 

<은평, 담소전>은 지역주민의 사진을 통해 은평생활사를 들여다보는 자리로 <후원 : 서울문화재단> <주최, 주관 : 은평문화재단>, <진행 : 반짝반짝사진방>에서 진행한 지역문화기록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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