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한 의원에서 발행한 처방전. 질병분류기호는 물론 전화번호, 팩스번호 등이 모두 기재돼 있다. <사진출처 : 약사공론>

제가 요즘 왕진을 이유로 진료실을 비우는 날이 생기자, 원래 살림의원에 다니시던 분들이 급작스럽게 아프게 될 때 다른 의원을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제게 찾아와서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시죠.

“그때 원장님 안 계실 때, 어디가 아파서 요 앞에 다른 곳에 가서 약을 받아와서…”

“그 약 좀 보여주세요, 처방전”

“어, 안 가지고 왔는데요, 그냥 원장님이 처방해줘요. 그거 잘 안 들었어요.”

“안 돼요. 무슨 약을 썼는데 안 들었는지 알아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요.”

“그, 그런가…”

어떤 환자분께 왜 처방전을 가지고 오지 않는지 물어보니, 옛날 어느 병원에선가 다른 병원의 처방전을 가지고 갔다가 야단을 맞았다는 겁니다. 그 원장님이 엄청 자존심 상해하셨다고요. 그래서 혹시나 제 자존심이 상할까봐 걱정되어 다른 병원의 처방전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지 않았다고 하시더군요.

의사는 전문가입니다. 전문가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과 평가입니다. 전문가는 다른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별 것 아니게 보이는 처방전이라도, 그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의견 교환의 장입니다. 우리 의사들은 진료기록으로, 진단서로, 진료의뢰서로, 소견서로, 또 심지어 처방전으로 다른 의사들과 의견을 주고받습니다. 

다른 전문가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아도, 환자분의 상태를 판단함에 있어 그들의 의견을 중요하게 고려할 수는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환자분이 3일 전에는 이 과 전문의로부터 이런 약들을 처방받을 정도의 상태였구나하는 정보는 너무 중요한 정보입니다. (요즘 저 과 전문의들은 이런 약들을 많이 쓰는구나하는 부가적인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질환들은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맞는 약을 찾아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흔한 증상 중의 하나인 '기침'만 해도, 확률이 높은 약들부터 순차적으로 써 가면서 맞는 약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진단을 해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첫 번째 방문한 병원에서 잘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또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환자분들의 경우, 대개 이 과정을 여러 병원에서 처음부터 새로 밟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시간 낭비, 자원 낭비가 되고, 어느 의사라도 돌팔이 같아 보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병원을 옮길 때 옮기더라도 어떤 약들을 이미 써 보았는지 정보를 얻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다른 전문가들의 합리적인 의심을 믿고, 그들이 하지 않았던 다른 시도를 다른 방향에서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요.

가능하면 주치의 병원을 정해놓고 꾸준히 믿고 다니되, 혹시 급해서 다른 병원에 가게 될 때는 꼭 처방전을 챙겨서 가도록 합니다. 잘 들었던 약도, 잘 듣지 않았던 약도, 환자와 의사에게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리고 혹여 다른 병원에서 받아온 진료기록이나 처방전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병원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진료를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라도 환자에게 중요한 정보들을 소홀히 대한다면 그것은 전문가로서 계속 정진하는 자세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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