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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그 너머로 가고 싶다.
  • 이문영 / 세상을탐구하는 페미니스트 엄마
  • 승인 2019.02.2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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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서밤>

치열한 시간들이 지났다. 작년 설날의 나와 올해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나는 ‘빨간약’을 먹었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여성주의를 공부하며 과거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모두 다 뒤집어졌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겐 불편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으론 내면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제도, 그 안에 속해 있는 며느리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씁쓸하기만 하다. 명절이 면 어김없이 시가에 가지만 즐거웠던 적이 없다. 명절이 가부장제의 성차별적 억압의 ‘끝판왕’이라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그 자체가 갖는 무의미함에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형식이 의미를 짓눌러버리는 그 상황을 나는 언제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형식은 여성의 희생이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행위를 반복하는 것만큼이나 고달픈 어머니의 삶을 본다. 십 수 년을 봐왔다. 희생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 왜 그토록 명절,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다 자식 잘 되라는 마음이다. 차례 상, 제사 상 차리면서 이렇게 공덕을 쌓으니 돌아가신 조상님이 자식들을 보살펴 줄 거라는 믿음이다.

그것이 어머니 식 사랑표현임을 알고 있다. 그 사랑을 알겠기에 존중했지만 자기 자신은 없는 텅 빈 그녀의 삶이 자꾸 보여 괴로웠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비련의 여주인공 같다. 그녀는 오로지 명절에만 주인공이 되지만, 행복해 보이는 주인공은 아니다. 

 그동안 나는 여러 가지 제안을 했다. 설날엔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해먹고 일주일 뒤 제사 때는 제사음식을 제대로 해보면 어떨까 물었다. 음식을 각자 만들어오고 명절 당일엔 윷놀이나 고스톱 치면서 놀자고, 몇 년에 한 번쯤 가족끼리 소풍이나 여행도 가자고 졸랐다. 나에겐 조심스러운 제안이었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고심한 것이었다.

결혼 생활 14년 동안 하나씩 나의 의견을 말해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눈치를 살피며 제안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묻고 싶다. 가족 안에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어떤 의미인지. 남편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한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나만 참으면 된다고 한다. 그의 최대다수의 행복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다. 왜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지 말이다. 그 희생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계속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동안 희생을 해왔던 사람의 자리엔 대신할 ‘다른’ 사람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 자리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그 희생은 틀렸다고 문제제기 할 수 없는 시스템인 가족제도 안에서 희생을 거부하기로 선언한 사람은 ‘마녀’가 된다. 가족의 사랑을 헤치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야 부작용이 없다는 꼰대들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되바라진 며느리. 나는 이미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희생하지 않아도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다. 내 행복을 버리지 않아도 상대가 행복하길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 사이에 간극이 있다면 힘들겠지만 좁혀가고 싶다. 노력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진정한 관계를 맺고 싶고 그렇게 가족이 되고 싶다. 그것이 희생을 넘어서서 내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며느리가 아닌 나로 살고 싶다.

이문영 / 세상을탐구하는 페미니스트 엄마  mmmoon7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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