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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간판 안 내리나, '순결'이 뭐람?은평구 60개교 교훈 분석 결과 ‘성실·근면’, ‘종교 강요’ 많아
  • 이해람 인턴기자
  • 승인 2019.01.0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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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을 닦고 기술을 연마하여 이 몸을 나라와 겨레에 바치자!

성신예(誠信禮)를 바탕으로 애국하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자!

언뜻 보면 70년대 경제발전을 독려하기 위한 구호이거나 어느 교회 안에 쓰여 있을 것 같은 글귀로 일상생활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말들이다.

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 교훈

하지만 이 글귀는 은평구 내 학교 교훈이다. ‘인격을 닦고 기술을 연마하여 이 몸을 나라와 겨레에 바치자!’는 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 ‘성신예(誠信禮)를 바탕으로 애국하는 사람이 되자!’는 세명컴퓨터고등학교,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영락중학교 교훈이다.

교육 이념과 목적을 함축하는 교훈을 통해 학교는 학생들에게 태도와 가치관을 가르친다. 그러나 현재 은평구 내 학교들의 교훈이 담고 있는 교육 이념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학생들이 공감하기 힘들다. 학생들에게 현실에 필요한 가르침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 멈춰버린 교육 이념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은평시민신문에서 은평구 내 60개 학교를 대상으로 학교 교훈을 조사한 결과 대다수 학교 교훈이 구시대적인 교육에 얽매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시대 흐름에 맞는 교육 정책이 제때에 이뤄지지 않는 결과로 읽힌다.

먼저 ‘튼튼한’, ‘건강’, ‘굳세게’ 등과 같이 체육적 덕목을 강조하는 단어가 드러난 교훈은 은평구 내 학교 교훈 중 26개(43.3%)였다. 1900년대 초 일본 군국주의가 체육을 강조하면서 형성된 ‘지덕체(智德體)론’이 국내 교육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교훈이 은평초등학교의 “튼튼한 몸, 성실한 마음”과 불광초등학교의 “바르게, 슬기롭게, 굳세게”이다.

‘성실’, ‘근면’, ‘부지런’, ‘힘’, ‘능력’과 같이 부지런한 노동력을 강조하는 단어가 드러난 교훈은 은평구 내 학교 교훈 중 19개(31.6%)였다. 

1954년 제1차 교육과정이 제정된 이후 노동력을 창출하기 위한 교육이 중시되었다는 것이 교훈에서도 드러난다. 제1,2차 교육과정 시기 개교한 16개 학교 중 11개(68.7%)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또한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된 이후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을 양성하기 위해 ‘애국’, ‘민족’, ‘봉사’ 등이 명시되기 시작했다.

유신헌법이 제정되는 정치적 변화가 교육에 반영된 제3차 교육과정(1973~1981)시기에는 윤리·도덕교육이 기초학문보다 강조됐다. 따라서 ‘바르게’, ‘정직’을 포함한 교훈을 1970년대 개교한 학교 10개 중 4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교 설립 혹은 교육 목적에 따른 차이도 있다. 1921년 순종의 하사금으로 설립된 기예학교인 동명여자고등학교는 “민족을 위한 봉사를”을 포함하는 교훈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다. 1970년 연성공업기술학교로 개교한 은평메디텍고등학교의 교훈은 “탐구, 창조, 봉사”, 같은 해 신진공업고등학교로 개교한 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의 교훈 “인격을 닦고 기술을 연마하여 이 몸을 나라와 겨레에 바치자”, 1974년 불광종합학교로 개교한 세명컴퓨터고등학교의 교훈 “성신예를 바탕으로 애국하는 사람이 되자”에서 기술 연마를 통한 애국과 봉사를 강조한 것이 드러났다.

설립 시기의 사회상을 반영한 교훈이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학생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발적인 성장을 이끌어내야 할 학교가 여전히 ‘성실’, ‘슬기’, ‘애국’, ‘바르게’, ‘봉사’와 같은 교훈을 명시하여 국가를 위한 희생과 획일화된 인재상을 강요하고 있다.


특정 종교 담고 있는 교훈 많아

선정중학교 교훈

기독교 재단이 설립한 예일초·중·고·디자인고등학교의 교훈은 “경천, 애국, 애인”이며 선일여중·고, 선일이고는 “착한 마음, 튼튼한 몸, 의로운 힘”이다. 선일학원은 ‘착한마음’을 교훈으로 삼으며 가부장적 문화 안의 여성상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예일학원은 기독교 이념을 우위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숭실중학교는 “경천애인”, 숭실고등학교는 “참과 사랑에 사는 사명인”이며 영락중학교는 교훈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자”이다. 

대성중·고등학교의 교훈은 “근면성실”로 특별한 종교적 특색이 드러나 있지 않다.

통일교 재단이 설립한 선정초·중·고·관광고등학교 교훈은 “정직, 순결, 친절, 봉사”로 ‘순결’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음란과 타락’을 경계하는 통일교의 종교적 특성뿐만 아니라 한양여자상업중학교가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성차별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학교 11개 중 6개 학교 교훈에서 ‘경천애인’을 교훈으로 삼고 있어 공공교육기관이 특정 종교를 교훈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종교자유침해 소지논란이 될 수 있다.

(왼쪽)영락중학교, (가운데)역촌초등학교, (오른쪽)신도중학교

변화하는 교육과 교훈

1982년 제4차 교육과정이 제정된 이후 교육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되고 전인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학생 선택권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착하게’와 같이 인격을 강조하거나 ‘긍지’, ‘탐구’, ‘노력’과 같이 학생의 학구열이 드러나는 단어를 3개교(37.5%)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더불어 1986년 설립된 증산중학교에서는 ‘협동’을 포함하여 공동체주의가 교육에 반영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997년 제정된 제7차 교육과정 이후 탄력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꿈’, ‘미래’, ‘행복’, ‘사랑’, ‘자주’같이 미래지향적이고 학생 중심적인 단어가 등장한다. 위 같은 단어를 포함하는 교훈은 13개교 중 7개교(53.8%)이다.

현실에 발맞춘 교육을 위해 구시대적 교훈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2009년 개교한 하나고등학교는 “세계가 나를 키운다, 내가 세계를 키운다”라는 교훈을 통해 세계시민교육을, 2011년 개교한 수리초등학교는 “함께하는 우리”라는 교훈을 통해 공동체교육을 강조하였다.

은평구 내 기독교 학교를 졸업한 한 학생은 ‘경천애인’이라는 교훈에 대해 “기독교 정신을 공부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를 배우는 것에 도움이 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을 강제하는 것은 종교자유 침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졸업생은 교훈이 “‘왜’, ‘어떻게’에 대한 고민 없이 개인을 한 방향으로 통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해람 인턴기자  epnews@e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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