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100여편 작품 써 내려간 원로작가 이길융 <중매이야기> 펴내

원로작가 이길융. 28년째 대조동에서 살며 10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은평의 원로작가 이길융(80)이 최근 소설집 <중매이야기>(문학나무)를 냈다. 

소설집은 ‘청둥오리’(2005년)부터 ‘어느 청백리의 꿈’(2018)까지 단편 8개를 묶었다. 표제작 ‘중매이야기’는 주제가 비슷한 ‘연줄’(2011)과 ‘기이한 인연’(2017)을 합쳐 개작했다. 장편으로 만들려했으나 힘이 부쳤다. <사랑의 그림자를 저울에 달다>(1998), <강도공화국>(2007), <행복한 눈물 밑에 웃음>(2008)에 이은 네 번째 소설집이다. 

장편은 <종착역의 표상인>(1990), <숨 쉬는 하늘>(1995), <한강나나니>(1999), <가시꼬네 사랑이야기>(2001), <하얀 방 임마누엘>(2004), <소생>(2009), <외포리 연가>(2013), <만주부인>(상, 하권, 2015) 등 8편을 썼고, 희곡은 <거북선아 돌아라>(2006)로 묶었다. 

<종착역의 표상인>을 데뷔작으로 치면 30여 년 동안 책 14권에 100여 편의 작품을 썼으니 많지도 적지도 않은 분량이다. 하지만 2002년 퇴직한 공무원임을 고려하면 매우 열정적으로 집필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형님의 훈장이 65년 만에 지각 전달됐다

이러한 열정은 어디서 나올까. 창작의 뿌리는 무엇일까. 11월7일, 23일 작가를 두 차례 만났다. 그는 작품 이야기에 앞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형님의 훈장과 훈장증을 꺼냈다. 며칠 전 구청을 통해 전달받았다.  

“제6보병사단 육군상병 이송웅 군번 0665710. 귀하는 멸공전선에서 제반애로를 극복하고 헌신분투하여 발군의 무공을 세웠으므로 그 애국지성과 빛난공적을 가상하여 대통령 내훈 제2호에 의거한 국방부장관의 권한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수여함. 무성화랑 무공훈장. 1953년 8월26일. 국방부 장관.” 

‘2018년 10월31일자 위자에 대한 서훈기록에 의하여 본증을 발행함’이라고 부기했다.

이송웅 상병은 한국전쟁 휴전 10일 전인 1953년 7월17일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산화’했다고 전한다. 한 고지를 두고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등 마지막 땅 뺏기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작가는 휴전 10여일 뒤 형님의 행방불명 통지서가 왔다고 기억한다. 

“행불 통지서는 사망 통지서였어요. 뒷산에 올라가 얼마나 통곡했는지 몰라요.” 

그는 <만주부인> 하권 49쪽을 펴보였다. 작가의 분신인 등장인물 이영열이 제6보병사단 수색중대장 김종필 중령을 만나, 형님이 어떻게 전사했는지 듣는 대목이다. 

“그날 저녁 중공군이 38고지에 얼마나 대포를 퍼부었던지 부대가 괴멸되고 몇 사람만이 살아남아 후퇴했어요. 닷새 후 6사단이 재반격하여 그 고지를 탈환해서 보니 피아간 대포의 폭격에 찢겨진 시체만이 산을 덮고 있었어요. 일주일 후 휴전이 되고 인식표를 찾은 군인들은 동작묘지에 개인 묘비를 세워주었고 인식표도 찾지 못한 행불자는 뼛조각을 골짜기에 모아다 한꺼번에 묻고 2km 후퇴하여 휴전선 철책선을 쳤지요. 공동무덤은 비무장지대 안에 지금도 있을 겁니다. 그때 인식표를 찾은 사람도 행방불명자로 집에 통지했지요.” 

가상의 조우이지만 내용은 취재를 바탕으로 한 사실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날’은 김 중령이 면회 온 아내를 만나 외박을 해 죽음을 모면한 날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훈장이 65년 만에 지각 전달된 까닭은? 

“군대 이름과 호적 이름이 달라서 그랬던 거 같아요.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을 미처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입대했거든요.” 

옛 호적을 보면 작가 집안은 1940년 일본식 류정(柳井)으로 성을 바꾼다. 이때 항렬자를 딴 행열, 홍열, 훈열, 길열 형제는 각각 행웅, 부웅, 송웅, 길융으로 개명한다. 해방 뒤 성과 이름을 되찾게 되는데, 서훈자 이송웅은 훈열로 회복하기 전 이름으로 입대한다. 당시 호적이 정리되지 않았거나, 개명한 이름 그대로 불렸는지 모른다. 하여튼 훈장이 이씨 집안에 이르지 못한 데는 이름의 착종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좋게 봐서 그렇고, 실제는 정부, 더 정확히 말하면 국방부의 태만이다. 전후 행불 통지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가. 

“육본 6.25무공훈장 찾아주기 전담팀이라며 연락이 왔습디다. 이송웅이 당신 형님 맞냐고. 본적지인 완도군 고금면까지 가서 옛 호적을 뒤져본 모양입니다. 저한테까지 연결된 거죠. 훈장을 동사무소에 맡길 테니 찾아가라고 하데요. 허허. 구청에 맡기라고 했어요. 장관은 아니어도 구청장이 수여하게 하는 게 어떠냐고요.” 

그는 훈장과 함께 받은 국방부 장관 이름의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형님이 자기 손목을 잡고 있는 느낌일까. 시계를 어루만지며 울먹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학창으로 돌아갔다. 그가 즐겨 쓰는 작중인물의 회상처럼.  

이길융 작가가 한국전쟁 당시 군복무중인 형님과 주고 받은 편지들

소년 길융은 훈열 형이 군 복무중일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위문편지를 썼다. 전쟁 중 형이 위로 받기는 고향편지가 제일이고, 고향에서는 답장으로써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길융은 친구 삼촌이 운영하는 책방에서 신간을 빌려다 저녁내 읽고 아침에 돌려주었다. 편지를 잘 쓰기 위해서다. 같은 대상에게 일주일 단위로 편지를 하다보면 비슷해지게 마련. 어떻게 할까 고민을 독서로 푼 것이다. 거의 3년간 그렇게 했는데 한번은 강 상사라는 분이 편지를 보내왔다. 

“송웅이와 나는 친한 친구가 됐네, 송웅이가 중요한 교육을 며칠 전에 받으러 가서 우리가 먼저 동생의 편지를 봤네. 송웅이는 동생에게서 편지가 오면 내무반 벽에 붙여놓고 누구든지 보게 했네. 자네 형 송웅은 글씨가 달필이고, 동생은 문장가로 부대에 소문이 나 있네. 자네의 1학년 때 문장과 2학년, 3학년 위문편지를 보면 장족의 발전을 하는 모습이 보이네. 송웅은 자네가 앞으로 대문장가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데.”

대문장가라는 단어가 뇌리에 깊이 박혔다고 했다.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아르바이트로 동명동 빵집 아들을 가르쳤다. 공부하는 모범을 보이려 아이가 문제를 푸는 시간에 열심히 글을 썼다. 소설을 써서 출판하면 상급학교 진학할  돈이 생긴다는 생각도 했다. 고2 때 장편을 완성하여 당시 전남일보 김남중 사장(화가 천경자의 남편)한테 보였더니 재밌다고 했다. 그뿐. 서울 회현동에 있는 정음사라는 출판사를 찾아갔다. 결과는 퇴짜지만, 놀러왔던 조병화 시인(당시 서울고 국어교사)이 자신은 짧은 글만 써 소설은 모른다면서도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줬다. 

< 해당화 피는 마을> 공연에서

작가가 되려면 철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대 철학과를 지원했다. 글 쓴다며 껍적거리며 공부를 게을리한 탓일까 낙방. 낙향해 실의에 빠진 채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추석맞이 공연을 하자는 친구들 권유로 연극대본을 썼다. 3막9장 <해당화 피는 마을>이다. 좌우익 살상이 있었던 섬마을의 전후, 바지락 양식장을 둘러싼 두 마을의 대립과 젊은이들의 사랑과 갈등을 다뤘다. 주요장면마다 그에 걸맞는 유행가를 섞어 넣었다. 

친구들이 배역, 자신은 연출. 재밌다는 소문이 퍼졌다. 면장 요청으로 섬 한가운데 장터에서 재공연을 했다. 근처 학교에서 교단을 빌려 무대를 만들고 천막을 두른 다음 횃불을 조명 삼았다. 막간에 분위기를 돋우려 얼굴에 오징어 먹물을 바르고 무대에 올라 탭댄스를 췄다. 이길융이 소설과 희곡을 아우르는 작가로 우뚝 선 데는 이때 성공했던 자신감이 든든한 밑받침이 됐을 터다.  

공연에 만족한 마을 유지들이 새끼줄에 지폐를 끼워 주었다. 당시 동네 천막공연은 입장료 대신 그런 식으로 기부를 받았다. 그 돈으로 매형이 있는 서울 홍제동으로 올라왔고, 다음해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돈을 벌자는 심산이지만 문필의 꿈은 여전했다. 대학 3학년에 장편 <짱크선>을 완성해 박종화 교수한테 보였다. 짜임새 있고 재밌기는 한데 사투리가 많다며 3년 뒤 다시 읽어보고 출판하라고 했다. 퇴짜. 졸업 뒤 군 복무를 마친 다음 읽어보니 과연 사투리가 많고 문장도 시원찮았다. 

1966년 <영화잡지> 7월호에 <애정의 보수>라는 시나리오를 투고해 활자화 되기도 했다. 또다른 원고를 넘기니 돈이 없다고 했다. 글을 써 생활하기가 어려움을 깨닫고 공무원(5급 재정직) 시험을 봐 합격했다. 

 첫 근무처는 국방부 인사국 군종담당관실. 군종장교 충원을 담당했는데, 종교별로 기준이 달랐다. 야간신학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며 종교별 형평을 맞췄다. 또 다른 문제는 군대내 사기 저하. 월남전 철수에 따른 패배감, 참전-비참전 병사 사이의 알력 등으로 전방부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25사단에서 한 병사가 누나 결혼식에 다녀오겠다며 휴가를 신청했는데, 중대장이 야유조로 응대하자 총을 난사해 중대장과 중대원을 사살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방부에서 해법을 내부 공모했다.

그가 건의한 군 복음화 운동이 채택됐다. 군목 외에 외부의 부흥목사들을 전방부대에 초빙해 사병들과 함께 동초, 보초를 서게 하는 등 사흘간 병영체험을 하게 했다. 숨 쉴 때마다 허연 김이 나오는 강추위, 목사들은 초병 등을 두드리며 함께 울었다. 설교, 세례식에서 부대 전체가 세례를 받은 기적도 있었다고 한다. 천주교, 불교에서 요청이 들어와 전군 신자화 운동으로 확대했다.

작가는 이 운동으로 풀죽었던 군대 분위기가 일신되고, 제대군인들은 산업현장으로 들어가 경제개발 역군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 일화는 2009년 장편소설 <소생>의 뼈대가 됐다. 

이 소문이 퍼져 문화공보부(문화관광부 전신) 종무실로 차출됐다. 사찰 정화가 맡겨졌다. 당시 절 주변은 무허가 음식점과 집 없는 이들의 가건물이 난립해 있었다. 절 아래쪽에 2천여 평 주차장을 만들고 그 주변에 가게와 여관을 지어 옮겨가게 했다. 불도저를 동원해 절과 주차장 사이에 시원한 길을 냈다. 현재 절 주변 번듯한 모습은 그때 갖춰졌다. 반대가 심한 수덕사, 범어사, 선암사는 그대로 두었는데 10여년 뒤 수덕사 방장이 찾아와 그때 지시를 따를 걸 하며 후회하더라고 회고했다. 

3년 정화사업이 끝나자 5대 궁궐, 14개 왕릉 정화사업을 맡겼다. 전쟁 뒤 휴식공간이 없던 차 궁과 능역에 매점과 식당, 놀이시설을 허가해줬는데, 궁릉을 찾는 외국인이 늘면서 원상회복할 필요가 생긴 것. 매상이 쏠쏠한 마당에 상인들이 철거요구에 쉽사리 응하겠나. 게다가 공무원, 정치인과 유착돼 저항이 심했다. 철거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국회의원 빽을 쓰고, 심지어 돈을 싸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어느 청백리의 꿈>이란 단편으로 썼다.  

 국립극장장 시절

공은 위로 가고 과는 아래로 오기 마련. 정화사업이 끝나자 국립극장으로 쫓아보냈다. 이때 자료실에서 공부를 하며 희곡을 쓰는 한편 논문시험을 쳐 150명 가운데 4명에 들어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야간으로 대학을 다닐 때 잠시 농민잡지 기자로 일하며 배운 두괄식 기사 작성경험이 주효했다.

경주사적관리소장, 문공부 종무과장을 거쳐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 사무장 겸 건설본부장이 됐다. 김영삼 의원의 친구 아들이 건설을 모른다며 마다한 자리다. 덕수궁에 스스로 건설본부 간판을 달고 아르바이트생 1명으로 시작했다. 맨땅에 헤딩하기. 넓이와 환경, 서울 도심과의 거리 등 몇 개 조건을 충족하는 후보지를 답사해 창경원 동물을 옮겨가기로 한 청계산 골짜기에 5만평을 확보했다. 

터파기 공사 중 풍수에 조예가 깊은 중학교 때 선생님이 찾아왔다. 

“미술관 자리를 보니 장군대좌형일세. 장군 불알에 해당하는 두 봉우리를 밀고 미술관을 지으면 훌륭한 미술인이 나올 걸세. 다만, 두 사람의 희생이 따를 거네.” 

그때는 웃어 넘겼으나 나중에 예언이 적중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의 장조카가 익사하고, 김세중 미술관장이 위암으로 사망한 것. 

미술관 건설 거지반을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미술관에서는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지>를 간행하는데, 여기에는 그가 간여한 건설초기의 경과가 생략돼 있다. 이길융은 1990년 저간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써 장편소설 <종착역의 표상인>으로 썼다. 건축가 김태수와 김수근이 경합한 사실, 김수근이 요로에 로비한 사실을 담았다. 

김수근은 전시동을 순차적으로 지어 연결하는 방식, 김태수는 한꺼번에 짓는 방식을 제안했는데, 전자는 예산확보가 어려운 현실에서, 후자는 컨셉트를 일관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결국 김태수 안으로 결정됐다. 이길융은 소설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을 요릿집에 불러 예산을 따낸 일, 국내 처음으로 자연채광 방식을 어렵게 성사시키고, 전국을 누며 외벽으로 쓸 붉은 화강암을 찾아낸 일화 등을 소개한다.

 이길융 작가의 작품들. 30여년동안 100여편의 작품을 써내려갔다.

1985년 간행물담당관이 됐다. 납품받은 국내외 서적을 검토해 판매금지 여부를 결정하는 게 일이다. 급선무는 <민중교육> 판매금지사건 뒷수습. 그는 대학생 20여명을 한시 채용해 해방 이후 판금된 서적을 재검토했다. 공산주의와 직접 관련된 책을 제외한 나머지를 판금해제하고 폭력, 음란성 기준도 현재 시점으로 완화하도록 했다. 그 결과 서점이 살아났다. 한길사, 돌베개 등 사회과학 출판사가 자리 잡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다.

88올림픽 한 달 전 서울에서 국제펜클럽대회가 열렸다. 소련과 중공을 비롯해 폴란드, 유고,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국가들 대표가 대거 참석했다. 이들은 한국의 구속작가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회를 보이콧하겠다는 것. 당시 예술과장이던 이길융은 정한모 장관에게 면담을 허용할 것을 건의했다. 

“지난 모스크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반쪽짜리였다. 공산권이 보이콧했기 때문이다. 펜 대회를 서울 올림픽 성공 기회로 삼자. 소련과 중공 작가들한테 자국이 올림픽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게 하자. 그렇게 하겠다면 작가들 면담을 시켜주자.” 그들은 김지하, 김현장, 이산하, 김남주 등을 만났다. 뒷날 듣자니, 작가들이 자국에 서울의 발전상을 전화로 보고하더라고 했다. 서울 올림픽은 온쪽이 됐다. 이때 작가의 힘이 크다는 것을 깨달은 이길융은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990년 <종착역의 표상인> 출간은 그 열매다. 

이길융 원로작가의 최근 모습

1992년 부이사관으로 승진한 이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2002년 퇴직금으로 강화도에 집필실을 만들어 두고 창작에 매진하여 지금까지 소설, 희곡 100여 편을 발표했다.

 “송웅 형님이 중국 원폭에 관련된 것 같아요. 한국전쟁 말기에 맥아더가 중국에 대한 원자폭탄공격을 계획했거든요.”

기나긴 회고담은 다시 형님으로 되돌아갔다. 강 상사의 편지에서 형이 중요한 교육을 받았다고 쓴 점, 형이 휴가 중에 어려운 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한 점을 근거로 들며, 원자폭탄 공격에 앞서 필요한 요원을 교육한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작가적 상상. 형님 학력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그는 국졸이라고 했다.

유장한 그의 이야기는 또 다른 장편소설이었다. 거기에 그가 왜 작가가 됐는지, 작품은 어떻게 쓰였는지, 작품 배경이 왜 강점기, 해방, 좌우대립, 한국전쟁 등인지, 모든 의문이 풀렸다. 더불어 작중인물이 실제 인물과 조금씩 이름을 달리해 등장하는지도 알겠다. 할 말을 할 수 없는 공무원 생활이 얼마만한 스트레스였는지도. 작품들은 형식을 달리한 이길융 회고록인 셈이다.         

추기: 대조동 작가의 2층 집은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방마다 책과 자료가 그득할 뿐 번쩍이는 가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작가가 자료를 찾아 지하실에 간 사이 작가의 아내 서연심(76)은 귀엣말을 했다.      

“집이 허술하고 쬐깐하죠? 남편은 참 정직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일반직으로 1급까지 올랐죠. 땅 같은 거 전혀 안 샀어요. 오래 전 제가 잠실에 13평 아파트를 몰래 샀어요. 남편이 알게 됐죠. 공무원 아내는 절대 크면 안 된다며 즉시 팔게 했어요.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화환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요.” 

“이 집에서 28년째예요. 2002년 퇴직금 5천만 원을 보태 집을 새로 짓자고 했어요. 그런데 강화도로 나를 데려갑디다. 좋은 집 있다며. 강화도, 산정호수 등 여관을 전전하며 글을 쓰다가 집필실을 갖고 싶으셨던 거죠. 집 신축을 포기하고 그 집을 샀죠. 그나마 벽제에 샀더라면 값이 몇 배 올랐을 텐데, 원망스럽죠. 당시 벽제는 평당 90만원, 강화는 30만원이었는데, 요즘 벽제는 돈 천, 강화 돈 백 하거든요.” 

“제 눈엔 돈이 보이는데 아저씨는 오로지 책밖에 몰라요. 공무원 재직 때 청계산 자락 땅을 조금만 사뒀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쩌겠어요. 아저씨는 모를 거예요. 이거 처음 하는 얘긴데, 제가 머리를 썼죠. 부업을 했어요. 여인숙을 전세로 빌려 리모델링해서 사글세를 줬지요. 월세를 받아 집안 살림, 애들 학자금을 충당했어요. 아저씨가 작품에 매진한 데는 제가 한몫을 한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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