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람 속 농부도 풍경의 일부로 여유로운 한때

“일찍부터 어딜 가려고 그리 서두르냐?”
“논에.”
“지금 논에 뭐 할 일이 있다고 가?”
“벼들이 쓰러졌을까 걱정돼서요.”
9월 첫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부스럭거리며 외출준비를 서두르는 딸과 엄마의 짧은 대화이다.

식사도 거르고 6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한여름 폭염 때는 더위가 영원할 것 같더니 아침 기온이 시원함을 넘어 서늘하게 느껴졌다. 일하기에는 좋겠다며 오스스 소름이 돋는 팔을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벌써 논에 가 있다. 운 좋게 태풍 솔릭은 비껴갔지만 그 뒤로 폭우와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 많았기에 더욱 신경 쓰였다. 특히나 토종벼는 개량종에 비해 키가 커서 벼들이 쓰러지는 일이 많으니 더더욱 그랬다. 

사실 이때는 바쁘던 여름 농사가 일단락되고 가을 추수 전까지 조금 한가하다. 예전에는 그때를 틈타 며느리들이 친정에 다녀오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며칠도 봐주기 힘들었는지 전어 굽는 냄새로 며느리를 유혹해 빨리 돌아오게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웃픈 얘기도 있다.
어쨌든 논이 걱정되는 농부 4명이 논에 갔다. 
 

큰 키에 색깔도 알록달록한 토종벼

한 달 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거의 모든 벼가 가지가 휠 정도로 이삭을 달고 키도 훌쩍 자라 있었다. 바람에 물결치는 벼들의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게다가 토종벼는 벼가 익을 때 황금색 일색이 아니다. 까만 것도 있고 붉은 것도 있어 알록달록 색깔도 예쁘다.

다행히 쓰러진 벼가 하나도 없이 잘 서 있었다. 대견하고 감사했다. 먼저 논 밖에서 전체적으로 벼들의 상태를 살폈다.
 

토종벼 용정찰

금개구리논에 자라는 토종벼 4종 중 유일한 찰벼인 용정찰부터 보았다. 
토종벼 중에서는 키가 중간쯤이라는데 그래도 옆 논의 개량종과 비교하니 키가 한 뼘 이상 크다. 낱알 색도 울긋불긋 예뻤고 알곡도 많이 달려 풍성해 보였다. 잘 쓰러지지 않아 재배하기에 적당하다더니 건강하게 잘 서 있었다.
 

토종벼 북흑조

용정찰 옆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북흑조가 있다. 
토종벼 중 키가 가장 크다. 옆의 용정찰보다 한 뼘 이상 크다. 개량종과는 멀리서도 금방 구분이 될 정도로 큰 키다. 그러면서도 줄기가 굵고 단단해 잘 쓰러지지 않으며 이삭마저 검은색이라 벼의 모습이 북방지역의 강인한 풍모를 연상케 한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대대로 힘들게 농사를 지어온 우리 조상들에게도 그런 든든함과 위안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또 앞으로 힘든 환경에서도 그렇게 씩씩하고 장하게 우리 논을 지켜줄 것 같아 믿음직스럽다. 현미 색깔은 진녹색이다.

그 옆에 있는 자광도는 짧은 진자색 까락과 현미 색이 자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밥맛이 구수해 궁중에 진상되던 품종이다. 키는 중간 정도이지만 대가 가늘고 거름 양에 따라 분얼이 많아 잘 쓰러져 재배는 쉽지 않은 벼란다. 

그래서일까. 처음부터 자광도 상태가 제일 불안했는데 결국 사달이 난 것 같다. 중간중간 벼의 줄기가 마르고 알곡도 말라버린 것들이 보였다. ‘해충 피해일까, 병일까? 만약 전염병이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지만 뭘 해줘야 할지 몰라 그대로 관찰만 했다.
 

토종벼 다다조

마지막으로 다다조를 살폈다. 
수확량이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개량종에 비하면 60~70% 수준이라고 하니 효율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요즘 사회에서 토종이 왜 자리를 잡지 못하는지 알 것 같다. 성숙된 이삭은 담갈색을 띠고 이삭 밀도가 높으며 맛이 좋은데다 지역 적응성도 높아 전국에서 재배되었다고 한다. 배곯던 시절 우리 선조들의 배를 불리는데 많은 기여를 했던 벼였겠다 싶다. 

하늘 좋고 바람 좋은 청명한 가을 만끽

어쨌든 자광도 빼고는 상태가 괜찮았다. 한여름 풀들이 그리 무성해 풀을 잡고도 걱정이었는데 벼들의 키가 쑥쑥 자라 이제 논 안의 풀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논둑이나 논 가의 풀들은 무성했다. 논 중간중간에 키가 삐죽 올라온 피들도 보였다.

논둑의 풀을 정리하고 논 안의 피도 잡기로 했다. 논에 들어갔다. 물이 차갑게 느껴졌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벼들의 키가 너무 컸다. 아니 내가 작은 건가. 벼 사이로 다니기가 어려웠다. 큰 비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이 너무 많이 차 있어서 깊숙이 발이 빠지는 건 물론 지난 번에 준 규소거름이 효과가 있는지 잎들도 제법 날카로웠다. 게다가 채 여물지 않은 알곡이 다칠까 무척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피인 줄 알고 어렵게 다가가면 다른 벼보다 조금 더 큰 벼였다. 그러기를 두어 차례 하다 피사리를 포기했다. 그냥 논 가의 풀들만 낫으로 쳐냈다. 

그렇게 2시간 가량 작업한 뒤 농막에 앉아 여유로운 한때를 가졌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도 적당하고 눈앞에는 알곡을 잘 달고 있는 벼들이 넘실넘실 춤추는 광경이 평화로워 보였다. 걱정스러운 자광도의 상태는 논 밖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잠시 농부들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 여유롭고 행복한 한때를 즐겼다. 
 

자광도 목도열병 의심

자광도 상태가 걱정돼서 나중에 알아보니 목도열병이 의심되었다. 이 병에 걸리면 이삭의 목 마디 부분이 연한 밤색이 되고 이삭은 잘 여물지 못하며 그 목이 부러진다고 한다. 듣자 하니 토종농사를 짓는 다른 논도 자광도의 상태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올해의 기후가 자광도에게는 힘들었나 보다. 

그런데 만약 자광도만 다 심었다면 어땠을까. 대규모 단일품종 농사의 위험에 몸을 떨며 다품종 소량 농사가 품은 많이 들지만 힘은 더 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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