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성심병원노조위원장 12번째 추모제 열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만큼 강렬한 게 더 있을까? 

살아생전에 얼굴 마주한 적 없는 사람이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건, 그가 남긴 발자취, 사람 내음을 이어 맺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일 거다. 청구성심병원노동조합을 통해 알게 된 이정미 열사가 내게는 그러한 사람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기일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추억거리도 없는 관계였다. 뜨거운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 작은 그늘막 아래에서 눈물과 땀방울이 얼룩진 기억으로 기일이 여름이었음을 기억할 뿐이다. 

재작년 출간한 청구성심병원노동조합과 이정미의 삶을 기록한 <아름다운 한 생이다>에서 그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청구성심병원노동조합 권기한 분회장으로부터 이정미열사 추모 행사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언제인가 권분회장에게 ‘많이 힘들고 지칠텐데 항상 밝은 모습으로 노동조합을 이끌고 온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이정미 열사, 그 분을 생각하면 힘들다고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실 때도 또 고인이 된 후에도 노동조합을 지켜 온 힘이 되어 주신 분입니다.”

전 청구성심병원 노조위원장 이정미 열사의 생전모습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1년에 한 번 뿐인 추모제도 매 번 참석하지 못한 미안함을 한꺼번에 만회라도 하듯, 이번엔 은평노동인권센터의 회원들과 같이 참석하기로 하였다.  

 은평노동인권센터에서 참여한 회원들은 소풍가는 아이들 마냥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 들뜸은 생전 경험하지 못한 것, 교육을 통해 공감한 여타의 것에 대한 응답, 또는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실천하고픈 양심의 움틈 그런 느낌이었다. 아침 9시 보다 한 시간 더 일찍 도착하신 분들도 계셨다. 

청량리역 앞에서 이정미열사정신계승사업회에서 마련한 전세버스를 타고 마석모란공원으로 향했다. 이정미열사의 남편과 아들, 오빠는 먼저 와서 묘지 입구에서 맞아주었다. 

유족들이 ‘12년 째 기억하고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할 때 마다 그 인사를 받을 건 우리가 아니고 당신들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그 폭력을, 고통을 아픔을 함께 받아내지 못해서…

 지난 번 참석한 추모제 때와는 다르게 큰아들 동민이도 가족들도 모두 편해 보였다. 12년의 세월이 느껴졌다. 노동가수 박준의 노래와 이제는 장성한 조합원 자녀들의 플롯 연주는 슬픔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힘을 주는 즐거운 자리로 바꾸어 보고자 준비한 것이었다. 이정미 열사의 큰 아들 동민이 추도사에서 한 말이 자구 되뇌어진다. ‘12살 때 엄마를 떠나보냈는데, 올해 지나면 엄마와 함께 한 시간보다 엄마 없이 살아 온 시간이 더 길게 됩니다.’ 라는 말이 애잔하게 마음속에 머물고 있다. 이어서 한층 밝은 표정으로 ‘아픈 사람들에게 기부하려고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어요. 머리카락을 기른 이유를 친한 친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철  없이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다니셔서 창피해요.’라고 말해 모두에게 웃음을 짓게 하였다. 

이정미 열사 추모행사가 끝나고 회원들과 함께 전태일 열사와 노회찬 의원 묘지를 찾아 꽃 한 다발 묘지 앞에 놓고 소주 한잔 올렸다. 참 많아도 너무 많은 열사들, 메아리 없는 희생이 언제까지 될 것인지, 자주 못 온 미안함을 뒤로 한 채, 추모제 참가자들과 인근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과 떡을 나누었다. 

영주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열사의 오빠는 해마다 추모제 참배객들에게 햇사과를 나누어 주신다. 사과 두 알을 받아 들 때면 그 안에 담긴 마음에 먹먹해지고 매 번 받아도 되는지 익숙하지가 않다. 이정미 열사 오빠의 흰머리와 사과가 자꾸 오버랩 된다. 돌아오는 길에 쌍용자동차노동조합 집회에 들렀다. 어깨마다 걸친 그림자인형이 눈에 띄었다. 30명의 죽음을 상징한 듯 무겁게 느껴졌다. 걸어서 여성집회가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앞까지 일행들과 함께 고단한 다리를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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