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속 아이들 이야기  

 교실 속 아이들 (이미지 출처 : 한국일보)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니 오래된 일이다. 우리 반에 서울에서 전학생이 왔다. 부모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언니는 결혼해서 서울에서 사는데, 그 누구도 고등학생인 막내를 건사할 형편이 안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사는 읍 단위 시골의 작은 아버지집 한켠 단칸방에 맡겨졌다. 

 누가 먼저 말을 건넸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와 나는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나는 그즈음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 빠져 있었는데 그녀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읽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읽은 작품을 그녀가 읽지 않은 걸 알았을 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크눌프’를 아직 읽지 못했노라 말했을 때, 그녀는 ‘그걸 아직 안 읽었다고? 그 정도는 벌써 읽었어야지.’라고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우리는 경쟁적으로 소설을 읽었고, 읽은 소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주말에도 늘 열려 있었던 학교의 중앙 계단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고는 했다. 그러다 보면 긴 그림자가 운동장에 내려앉았다. 

 얼마 전, 시조를 배우는 시간에 민주와 은수의 발표를 보다가 그녀가 기억 속에서 튀어나왔다. 오랫동안 생각해 보지 않은, 묵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존재였는데 불쑥 떠올라 반가웠다.

 민주와 은수는 뭐든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다. 수업이 끝나고 다들 집에 돌아간 시간에 그 반에 불이 켜져 있어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서로에게 질문하고 설명해 주며 웃고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면 둘은 서로를 견제할 만한 대상이었고 상대보다 더 잘하려고 애쓰는 듯도 보였다. 그런데 막상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서로에게 부족한 걸 보태 주고 빈 곳을 채워 주고 있었다.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뛰어 올라가 앉아
건너편 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가 떠 있기에 가슴이 섬뜩하여 펄쩍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다쳐서 멍들 뻔했구나.
 

 시조 한 작품을 스스로 분석하고 해석하여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민주와 은수는 이 작품을 선택했고 둘이 함께 발표를 했다.

 “은수씨, 이 작품의 형식에 대해 말해 주시겠어요?”

 “이 작품은 사설시조죠. 조선 후기에 문학이 산문화되던 경향에 따라 시조도 변화한 양상을 보여 줍니다. 민주씨가 보기에 이 작품의 내용은 어떤가요?”

 “이 작품에서 ‘두꺼비’는 자기보다 약한 ‘파리’를 입에 물고 높은 두엄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지요. 흡족한 성취에 만족하던 두꺼비는 산 위에 떠 있는 ‘송골매’를 봅니다. 은수씨! 두꺼비에게 송골매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두꺼비는 자신을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송골매를 보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을 겁니다. 송골매가 어떤 행위도 안 했는데 겁이 나서 자빠져 버린 걸 보면 알겠지요?”

 민주와 은수는 넉살 좋게 대화를 나누며 시조를 설명했다. 아이들은 킥킥대며 웃다가 시조 속에 빠져들었다. 약한 자 앞에서 자신만만했던 두꺼비가 강한 자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바보짓을 한다. 약자에게 군림하는 어설픈 강자가 더욱 비겁하고 초라해 보인다. 약자와 강자의 얘기는 시대가 변해도 늘 그 자리에 머물고 있음을 생각하니 입맛이 쓰다. 시조 감상이 아이들의 얕은 한숨으로 끝났다. 바라보는 나도 씁쓸했다.

 아이들이 경쟁하느라 서로를 할퀴고 있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는 경쟁하도록 제도를 만든 어른들이 내고 있다. 학교에서 깊이 상처받는 아이들을 볼 때, 벌써부터 이번 생은 끝났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볼 때 변명할 거리도 찾기 어렵다. 어른들의 부끄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세상이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의문을 품고 살아간다. 순간의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찾는 아이들도 있다. 민주와 은수 같은 아이들을 보며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이다. 서로 좀 겨루기도 하지만 서로가 ‘내 편’인 걸 마음이 안다. 그게 친구 아닌가. 

 미국에 있는 부모님한테 간 친구와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묵은 것들은 깊은 맛을 낸다. 기억 속에서 그녀를 불러들이니 여러 순간들이 스친다. 그녀는 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만나도 ‘난 네 편이야.’라고 말해 줄 것만 같다. 우리는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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