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학생, 첫만남의 풍경

출처 시사인

지역의 단체에 얼굴을 디밀다 보면 ‘나’를 소개할 일이 종종 있다. 첫 만남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기억 속에 머무는 시간이 짧다. 가볍게 대해도 될 텐데 나는 매번 그 시간이 버겁다.

은평구의 마을합창단 ‘꿈꾸는 합창단’ 문을 두드린 날에도 그랬다.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를 일도 심장이 조여드는 일이었지만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감했다. 뜨거운 삶을 살아 내지도, 타인들과 ‘억세게’ 부딪치며 살갗을 벗겨 내지도 못한 나. 그저 몇 해를 살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노래는 잘 못하지만 노래하고 싶다는 용기인지, 객기인지를 내보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해 놓고 나니 참 싱거웠다.

3월에 학생들을 만나면 ‘자기소개’ 시간을 갖는다. 자신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제재를 중심으로 소개하라고 조언한다. 관심사를 중심으로 보여 주어도 좋다고 한다. 자신을 둘러싼 요소들을 마인드맵으로 펼쳐 놓은 후 개성이 잘 드러나는 것을 골라 보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숨고 싶고 가리고 싶고 들키고 싶지 않은 ‘어른’들의 마음을 모르는 학생들은 어색해 하면서도 무언가를 끄적인다. 글 쓰는 사이를 오가며 교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만 머뭇거린다. 학생들 앞에서 ‘나’를 벗겨 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 사람 인생이 통째로 내게 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학생들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보여 주기도 한다. 아직 안전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라 서로를 경계하는 마음을 앞세우지 않는다. ‘어른’도 아니고 ‘어른인 척’하는 이도 아닌 아이들이어서 감사하다.

자기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그 글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귀한 글을 얻는다. 인용하는 아래 글들은 솔직한 면이 끌렸다. 유려한 문장보다는 진솔함이 담겨 있는 글이 마음을 울린다. 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학생들의 이름을 밝히지 못해 아쉽다.

“저는 A형의 지극히 평범하게 지내는 학생입니다. 취미는 노래 듣기이며 부르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잘 부르지는 못합니다. 좋아하는 색은 연보라색이나 에메랄드색같이 신비로운 색입니다. 키는 더 크기를 기도하는 중이며 다리가 짧아서인지 유연성이 좋습니다. 운동 신경은 좋지만 농구, 축구 같은 대중적 스포츠는 잘 못합니다. 성격은 친분이 없으면 내성적, 있으면 활발해지며 화는 참았다가 한꺼번에 내지만 화낸 뒤 10분 안에 사과를 못하면 불안해서 사과도 잘합니다. 제 성격의 여러 면을 본 친구들이 이중인격자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살찐 체형은 아니고 상반신이 큽니다. 달콤한 빵과 우유를 좋아합니다. 졸릴 때는 제 얼굴을 때립니다. 운이 많이 안 좋습니다. 안 좋은 타이밍을 많이 겪어 보았습니다. 안경은 5년째, 교정은 3년째입니다. 귀가 얇다는 소리를 듣고 가끔 우유부단의 최고봉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저 자신이 특이한 성격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다음 글은 국어 교사로서 눈길이 갔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난 기쁨이랄까. 반가웠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많이 얼떨떨합니다. 1지망으로 왔지만 살짝 후회하고 있어요. 그냥 친구들이 많이 가는 가까운 고등학교로 갈걸 그랬다 싶습니다. 고등학교조차 매우 큰 단체같이 보입니다. 여기에 있기는 한데 뭔가 따로 노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녹아들지 못했네요. 다들 할일이 많고 각자 사는 것 같아 보입니다. 고등학교가 이렇게 클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구석에 처박혀서 창문을 내다보면 등산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교실이 남아돌던 중학교가 그립습니다.

저는 책을 좋아하는데 좀 편식해서 읽는 편입니다. 발터 뫼르스 작가의 책을 좋아해요. 전세계 작가의 책을 읽는 편이지만 한국 고전은 싫어합니다. 엄마가 말하는 편식은 이런 거죠. 우리나라 소설은 대부분 너무 우울하고 삶이 비틀리고 갈등을 너무 여과 없이 보여 줘서 거북합니다. 책 읽을 여유가 아직 없지만 빨리 적응해서 책을 많이 읽고 싶습니다.“

다음 글은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낸 글이다. 관심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 보라는 주문에 대한 응답이었는데 본인의 관심사일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관심사이기도 해서 반응이 최고였다.

“저는 요즘 여자친구 덕분에 재미있고 살 만합니다. 벌써 131일째인데요, 더욱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아이에게만 너무 빠져 있어도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하려고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서로 다른 학교여서 잘 만나지 못하지만 주말에 가끔 얼굴을 보면서 한 주간 쓸 활력을 얻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만나 공부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행복하고 좋습니다. 이 글을 다시 보게 될 때에도 그 아이와 계속 사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만나면서 행복한 순간은 글로써 말로써 생각과 느낌을 나눌 때이다. 인간이 섬이면 어떤가. 그 섬을 오가는 작고 낡은 나룻배 한 척쯤 누군가 지니고 있기 마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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