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솔직한 정공법이 더 진실할 수 있다

시강을 하러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안에는 십여 명의 국어과 선생님들이 계셨다. 시강 주제는 ‘훈민정음’에 대한 것으로 기억한다. 양정고등학교의 교원채용방식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1단계 서류평가는 교원인사위원회와 관리자들이 전담을 해서 내부에서 마련한 기준에 따라 몇 배수의 대상을 선발하여 시강과 면접을 실시하는 방식이었다.

2단계 시강은 모두 국어과 동료교사들 앞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해 강의를 하고, 강의가 끝나면 해당 강의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순서였다. 물론 이 토론시간에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다. 시강을 마치고 나면, 학교의 교장과 교감 등의 관리자들과 심층면접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심층면접에서는 특이한 질문을 받았다. 당시 엄규백 교장선생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하셨다.

"선생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찍었나요?"
"네…?"

너무나 놀랐다. 우리나라의 선거는 비밀선거인데….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저 분 연세를 보아하니 70세도 넘으신 분이고. 교장쯤 되는 분이면 아무래도 노무현 후보보다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할 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엄규백 교장선생님은 이회창 후보와 고등학교와 대학 동문으로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교육부장관 후보까지도 하마평에 오르내릴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에는 그런 내막을 전혀 모른 채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답변을 했다. 그랬더니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아니, 아직 취임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시끄러운데…. 투표를 잘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다그치듯 말씀하셨다. 그 질문에도 여전히 굽히지 않고 소신껏 답변했다.

"지금은 변화와 혁신을 모색하는 시기이므로 많이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더욱 민주화 되고 소중한 가치들이 구현될 것으로 믿는다."

순간 깨달았다. 거의 동의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보면서, '아! 나는 최종 면접에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답변으로 떨어지는구나!'  면접이후 주변 선생님들의 반응은 그냥 접어야 할 거 같다, 다른 학교를 알아보자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전화벨이 울렸다.

"거기가 전경원 선생님 댁인가요?"
"예, 그런데 누구시죠?"
"선생님, 저희 학교에서 국어과 정교사로 최종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정교사로 최종 선발되었다는 소식에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이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지 몰랐다. 아무도 없던 집에서 시체처럼 풀이 죽어 낮잠에 취해 있었다. 35세라는 이르지 않은 나이에, 태어나 처음으로 정규직이라는 정교사로 취직이 된 순간이었다.

한 가지 풀리지 않았던 의문은 엄규백 교장선생님은 왜 나를 뽑아준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 해답은 정교사로 임용이 되고나서 교직원 회식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최종 면접을 봤던 선생님들이 내 보기엔 다 노무현을 찍었을 텐데, 모두 이회창을 찍었다고 하잖아. 근데 당신만 노무현 찍었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그래서 생각했지. ‘아! 이 정도면 정말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이겠구먼!’ 그래서 선생님을 뽑았어요."

그때 깨달았다. 때론 솔직한 정공법이 더 진실할 수 있다는 점을. 물론 그 정도를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의 관리자라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양정고등학교에서 나는 비로소 정교사로서 첫 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양정고의 생활이 진명여고와 판이하게 다르진 않았다. 여전히 수업시간에는 수능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문제집을 열심히 풀어댔다. 수능을 대비해서 문제집 풀이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했다. 아이들에게도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공교육의 역할이었다. 점점 교실은 학원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가장 슬픈 것은 이런 모습이 비단 내가 몸담고 있는 한 학교만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저작권자 © 은평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