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은평

첫경험. 짜릿하고 희열이 넘쳤다.

그 처음의 순간, 나는 소리를 질렀고,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내 딴에는 그럴 만했다. 첫 자취의 순간이었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오매불망 바라던 자취집을 얻은 곳은 은평구 독박골(불광동)이었다.

수십 군데 발품을 팔았고, 1998년의 봄, 지상의 방 한 칸을 얻었다. 오래된 연립주택 2층, 작고 아담한 내 공간. 나는 독박골에서 내 청춘의 시즌2를 시작했다. 이사했던 그날은 아직도 선하다. 친구 3명을 불러 이삿짐을 나르고 짐을 풀었다. 북적북적 몸을 움직였다. 짜장면과 탕수육, 그리고 소주를 곁들여 우리네 청춘의 ‘리부트’를 독박골에서 축하했다.

불광동. 부산 촌놈인 내게 그 이름은 웃음부터 안겨줬다. 코미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개그맨이 ‘불광동 휘발유’라는 이름으로 출연했었다. 그런 불광동에 자취집을 구했는데, 웃긴 건 집으로 연결된 골목 바로 앞에 주유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불광동 휘발유라고 놀렸다.

불광이라는 지명이 사찰이 많아 부처 서광이 서려있다는 뜻을 품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살짝 놀라긴 했지만. 나는 독박골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었다. 독박골은 독바위골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바위가 독(항아리)같아서 혹은 바위가 많아 숨기 편해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 독박골은 왠지 신비한 느낌이 났다. 세상에 초연하거나 세상과 불화하는 꼿꼿한 선비들이 스스로 은둔을 택한 곳 같았다. 은둔 고수들이 세상의 독박을 피해 숨은 거지. 물론 나는 숨을 이유 없는 가장 보통의 청춘이었지만.

불광역 2번 출구. 그곳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은 사색의 길이었다. 생각이 뒤죽박죽 엉킨 청춘의 시절, 나는 그 길에 생각을 뚝뚝 떨어뜨렸다. 지금도 그 길을 볼 때면, 그때 그 생각들이 어떻게 발효됐을지 궁금하다. 그때 그 길을 걸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다른 길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나로 존재할 테니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등 쭉 늘어선 연구 기관들을 지나 만나는 주유소에서 꺾어져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자취방이 날 반겼다. 그 언덕도 자주 오르내렸다. 동네 슈퍼가 언덕에 있었고, 비디오가게가 있었다.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비디오가게를 종종 들렀다. 자취생답게 이런저런 요리를 했고, 나는 그 음식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앞치마를 입고 요리할 때면 음악을 틀어놓고 룰루랄라 춤을 추면서 칼질을 했다. 그 모습을 누가 봤다면, 미친 거 아니냐며 깔깔깔 웃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시장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제일시장, 불광시장을 들렀고, 한 달에 한 번 지하철로 일산 까르푸(지금은 없어진 프랑스 대형마트)를 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201호. 2명의 친구가 함께 살기도 했고, 과객들에게 음식과 술, 잠자리를 제공했다. 겨울에 수도관이 동파돼 물이 나오지 않아 동동거렸던 기억도 잊을 수가 없다. 기름보일러라 추리닝 바람으로 주유소를 찾던 겨울날의 풍경도 선하다. 함께 살던 친구가 애인과 헤어지면서 폐인모드가 됐고, 졸지에 허구 한 날 술 대작을 하느라, 애먹었던 기억 또한.

무엇보다 그 시절, IMF가 훑고 지나갔다.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된 나는 한동안 그렇게 살다가 전세 계약이 끝나면서 독박골을 떠났다.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나고 서울혁신파크를 다니게 됐다. 신기했다. 독박골 시절, 질병관리본부는 담벼락이 무척 높았다. 심리적 장벽이 더욱 컸기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곳에서 나는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제 내 독박골은 없다. 내 청춘의 시즌2는 아파트에 질식사 당했다. 혁신파크에서 독박골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래미안이라는 브랜드만 선명하게 보일 뿐, 파편 같은 기억과 그리움만 흘러갈 뿐이다. ‘응답하라, 독박골 청춘’이라고 호명하고 싶은 내 마음의 은평을 글로 떠올릴 뿐이다. 글을 통해서라도 그리움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안녕, 내 독박골 청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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