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과 함께 짓는 마을학교 23]

압축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도시는 무한 팽창을 멈추었다. 오래된 풍경이 사라지고 말았다. 온통 개발의 광풍이 도시를 헤집어대고 도시 스프롤현상이 고정화 되고 있다. 이젠 이성을 찾아야 할 시기이다. 대지를 할퀴고 지나간 포클레인 자국을 걷어내고, 헐벗은 대지를 착한 사람들의 숲으로 가꾸어내야 할 때인 것이다. 도시재생이 건축계에 이슈가 된지 오래되었다. 가시적인 면에서는 오래된 도시를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여 사람들의 정주성을 높이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도시의 일상성에 시간이란 개념이 개입된다. 인간의 시간에는 재생이라는 무한 개념이 적용되기는 어렵지만, 도시는 대지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어서 대지의 시간에 대한 영속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주름진 얼굴과 흉터는 화장술이나 성형술로 잠깐 덮을 수는 있지만 반복적 재생은 현대의학으로는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도시와 마을은 영구한 대지의 기반 위에 길과 건물을 반복적으로 재생시킬 수 있다. 물론 도시를 재생하는 과정에는 사람과 문화가 그 주체적 행위자로 작동된다. 대지위에 구축한 도시의 시간을 재생하는 것이다. 

마을에서 흐르는 시간

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도시 위 건축물은 서서히 낡아가는 대상이지만 사람은 세대를 이어가며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자연의 시간은 끊임없이 인간이 구축해 놓은 도시 환경의 유한 시간을 노후화라는 이름으로 낡아지게 한다. 그 사회학적 시간 속에 자본과 경제적 논리는 환경 변화라는 개발논리로 유혹한다. 점점 도시와 건축의의 수명은 짧아지고 환경을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 시켜가는 것이다.

헤르더(J. G. Herder)는 원래 변화하는 모든 사물은 자신의 시간척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속에서 건축과 도시는 자기 속성에 따라 정해진 시간척도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을 거듭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재생은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는 것을 넘어서서 마을의 공간 사회학적 현실을 토대로 하여 인문학적 상상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인공적인 건축보다 사람의 자취와 역사가 먼저 고려되는 재생이어야 한다. 아주 오래된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마을을 그려놓았고 사람이 만들어 놓은 공간성과 장소성이야 말로 문화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간의 축에 미래세대를 그려놓았다. 그 중심에 마을이라는 공간이 있고, 마을의 우리 아이들이 있다. 왜 마을공동체 회복과 마을 재생에 교육을 주제로 한 마을학교가 있는지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마을에서 아이들을 함께 키워내고, 우리 현 세대의 시민으로서의 일상성이 함께 거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을이 학교이고 일상성이 배움이 되는 현장이다. 그리고 현재에 사는 아이들이 미래를 배우는 공간이므로 또한 미래공간과 이어져 있다.

이 시대의 교육은 카오스적 경향을 띤다. 이미 불확실성, 불확정성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아이들의 미래가 이 속에 존재한다. 내일이 어디로 가는지 예측불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무엇으로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고 현실 교육을 시대와 굳건히 결합시킬 것인가를 마을 교육에 방점을 둔 이유다. 사회는 나선형으로 진보한다는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독일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코젤렉(R. Koselleck)은 저서 <지나간 미래>에서 진보가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두 가지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 하나는 가속성이다. 미래는 가속적으로 다가온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미지성이라고 한다. 자기 가속적 시간, 즉 우리의 역사가 경험영역을 축소시키고 그것의 항상성을 빼앗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미지의 것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나간 미래’속에서 우리는 오늘을 산다.

읽다 만 아이의 책을 읽으며

곧 중학교에 입학 할 아이가 읽다가 던져놓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읽는 동안 왠지 모르게 이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딸아이와 동일 시 되면서 책장이 쉬이 넘겨지지 않았다. 우리 기성세대들이 통과해 온 그 과정을 이제 이 아이가 가야하는 길이라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 벅차고 기뻐해야 할 아이의 앞길이 사랑의 열병을 앓던 나의 청소년 시절을 환기하게 되어 애처롭기조차 하다. 이 아이가 이 황무지 같은 교육현실 속에서, 아니 무지막지한 경쟁 속에서 치러 내야 할 처절한 생존 게임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장엄한 시간에 격려와 응원 밖에 해 줄 것이 없다니.

“어, 아빠! 왜 내 책을 읽고 있어?”
“그냥. 책상위에 있길래.”
“아빠는 어릴 적에 이 책 안 읽었어?”
“다시 읽으니까 느낌이 새로워. 내용이 맛있게 씹히는 느낌…”
“응, 소화도 잘 되겠네!” 

우리 삶에서 오래된 규범과 관습은 때로 거대한 벽이 된다. 일상성은 외양은 평온해 보이지만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다. 이 속에서 무관심과 무의식적 제도 수용은 묵시적인 동조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미래세대를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기웃거리고 두리번거려야 공간이 생기고 틈새가 생긴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고질적인 체계에 대해 균열시켜야 미래에 대한 숨통이 트이고 그 틈에서 아이들이 피어날 수 있다. 그 속에서 바야흐로 ‘자기 가속성’과 ‘미지성’에 대한 마당이 만들어 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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