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그대의 삶을 응원한다거나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어요, 그러니 힘내세요 따위의 수사를 아무 의미 없는  희망 고문 이라고 일컫는다지만 그런 말조차 건내지 못한다면 서로의 삶에 대해 격려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어쩌면 인간의 삶에 가장 기초적인 말은 소위“ 희망 고문” 일지도 모른다. 

언어란 그런 것이다 몹시 안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걱정을 해도 위로의 말 한마디 없다면 그 진심은 반감된다. 눈빛이 변하고 얼굴이 일그러져도 터져 나오는 욕 한마디 없다면 그 분노 또한 전달되지 못한다. 이심전심이라지만 스스로의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신의 상황을 알아줄까. 특히나 요즘 같은 세상에.

다시 새해다. 벌써 은평 시민 신문을 창간하고 열네 번째 새해를 맞았고 꼭 열네 번째 새해 다짐을 적는다. 당연히 그간의 다짐이 잘 지켜져 왔는가에 대한 반성이 앞서는 일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까닭은 우리 은평 시민 신문은 사람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조합원의 숫자에 목표를 두었고 더 많은 지역의제를 생산해 냄으로써 자칫 지역 속에 묻힐 사안들을 공론화 시키는데 큰 목적을 두었지만 그런 목적의 실행 과정에서 소외되는 한사람조차 염려했기 때문이다. 정의의 잣대란 나의 이익으로 인해 손해 보거나 아파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 입힌 일에 대해서는 기사를 올리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지만 삶에 지쳐 아파하는 한사람을 찾는 일에도 성의를 다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머 어마한 것이다-중략-그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시”방문객“중). 사람을 살아가는 일에 신중을 더하는 것이야 말로 어마어마한 일이므로 은평 시민신문의 ”더딘 발걸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맹자를 초대한 양 혜왕이 말했다.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와 주셨으니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맹자는 대뜸 왕을 질책하듯 대답했다  “왕께서는 하필 利(이)를 말씀하십니까? 다만 仁義(인의)가 있을 뿐입니다.“萬乘(만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사람은 언제나 千乘(천승)의 祿(녹)을 받는 대신 집이요, 천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사람은 언제나 百乘(백승)의 녹을 받는 대신 집입니다. 만에서 천을 받고, 천에서 백을 받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참으로 義(의)를 뒤로 하고 利(이)를 먼저 하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왕께서는 역시 인의를 말씀하셔야 할 터인데 하필 이를 말씀하십니까?” -고사 명언구사전-. 요즘 눈에 들어온 맹자의 문구 “何必曰利”의 어원이다. 

아침저녁으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밤이면 별이 지천인 마을이 있었다. 물안개로 세안을 하고 별빛과 더불어 밤에 취하면 그만인 그 마을에서는 이익(利)을 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시 새해에 은평 시민신문의 창간정신을 떠올린다. 이익이 없다. 이익을 도모하는 어떤 의도도 없다. 다만 굳이 이익을 논하지 않아도 그만인 마을을 만들기를 소망하는 마음들만 가득하다. 

2018년 새해의 소망을 적는다. 창간이후 14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마음을 다 잡는 일이다.

한사람의 고통에 연대하며 한사람의 욕망을 질타하는 일이다. “적당한 갈망 지나친 낙관” 몸속에서 꾸역꾸역 솟아오르는 욕망덩어리는 최소화 하고 맘껏 상상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꿈꾸는 마을을 만드는데 더 없이 부지런을 떠는 일이다. 올해는 왈왈 짖어대기로 부끄럽지 않은 개띠 해이다. 새해 바람을 한 가지 더 적는다면 은평 시민들의 삶에 더 가까이 천착해서 그들의  생활로부터 파생되는 간절한 요구들을 더 많이 받아 적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크게 더 명징하게  짖어대는 것이다. 가능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짖어대는 일이야 말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최대한의 언어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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