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A.J. 크로닌의 자전적 이야기

12월의 밤을 만끽하고 계신가요? 천상을 빼곡하게 수놓은 달과 별들과 지상의 형형색색으로 뒤덮인 일루미네이션(조명) 사이의 공간, 그 곳을 가득 채웠던 얼어붙은 공기가 따스해지는 12월의 밤입니다. 나무나 건축물에 조명을 달아 장식하는 문화는 기독교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전구를 대중화시키기 전 구미(歐美)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촛불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여 밤을 밝혔다고 하죠. 

우리나라는 12월 25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불교와 유교 사상을 근간으로 전통과 관습이 이어져 내려온 동아시아 문화권 가운데 이 땅만이 서양 종교의 ‘성탄절’ 국가적 의미를 허한 것이 놀랍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 20조 1항에 의거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고 향유할 수 있으니 12월의 밤은 기독교 색채가 묻어나는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A.J. 크로닌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천국의 열쇠’는 주인공이 태어난 순간에서 사역을 마치는 순간까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기독교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카톨릭계 아버지와 개신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은 유년시절 내내 친척, 학교 급우, 마을 주민들에게 개신교가 아니란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합니다. 치셤은 그 후 수도원 생활을 거쳐 신부가 되는데,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하던 탓에 유럽 내 빛깔 좋은 신부와 수녀들에게 업신여김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중국으로 선교를 떠나 오랜 시간 머물며 죽을 고비를 거치고 절름발이가 되면서도 헌신적으로 지역민을 섬기고 기독교의 터전을 닦습니다. 그리고 처음 떠났던 남루한 모습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심한 낡은 걸레뭉치와 같은 행색으로 귀향하는데 여전히 그는 교계에서 홀대를 받습니다. 오죽하면 치셤 신부가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오, 주여, 제 평생에 단 한 번의 소원이옵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저의 뜻을 제발 이루게 해 주옵소서.”     

예수는 이 땅에 약자와 병든 자, 홀대받고 천시 받는 자의 편에 섰던 분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친 자들조차 용서해달라는 외침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작가 A.J. 크로닌은 허구적 인물인 치셤 신부를 통해 예수의 사역을 현대적으로 해석합니다. 치셤 신부는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할수록 큰 시련을 맞이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입니다. 그의 마음을 가장 상하게 하는 집단은 다름 아닌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중국 내 동일한 선교지에 새로운 개신교 목사가 온다는 소식으로 촉발된 카톨릭과 개신교 간의 대립은 현 기독교 내 갈등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신부님, 가짜 하느님을 믿는 미국인이 온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시끄럽다, 요셉.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거다. "치셤 신부는 엄하게 나무랐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의 오랜 갈등-방목해야 할 이유도 없으면서 공연한 증오와 질투로 서로 으르렁거리거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조그마한 교리 문제를 가지고 언쟁을 벌이고 논란을 일삼다가는 험악한 싸움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감각이 둔한 중국인들도 두 교회의 증오와 질투를 느낄 것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우습게보게 될 것이다. 이미 그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눈을 뜨고 봐야 지옥처럼 질서가 없고 혼란한 바벨탑의 주변처럼 분노와 소음과 저주만이 맴돌 뿐이다."

작가 A.J. 크로닌은 1896년 스코틀랜드에서 출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 때 해군에 입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의 시간적 배경은 유럽 전역이 독일과 연합군(영국, 프랑스 등) 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전락하던 때를 포함합니다. 전쟁터를 몸소 체험한 그는 당시 신앙인으로서 품었던 기독교 본질에 관한 의문을 중국 선교지에 파송된 수녀 간 갈등과정을 통해 다룹니다. 그녀들은 각각 독일, 벨기에, 프랑스 출신으로 고향 땅에 남은 가족과 친지, 지인들은 각 조국을 위해 참전하여 죽음을 맞기까지 합니다. 추억이 담긴 조국의 들판과 성당은 모조리 파괴됐다는 소식에, 각 나라 교회의 장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신이 그들 나라에 승리를 주실 것이라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수녀들은 서로를 증오하기 시작합니다. 모두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직자인데도 말이죠. 이들을 향해 치셤 신부는 이 모순적 상황에서 신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예언자적 태도로 일갈합니다.      

“교회는 스스로의 비겁함 때문에 언젠가는 후회의 괴로움을 씹어야 할 것입니다. 가슴 속에 기른 독사에 의해 언젠가 그 가슴을 물어뜯길 것입니다. 무력을 시인한다는 것은 파괴를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대한 군사력이 고삐를 끊고 날뛰면, 이윽고 교회로 뛰어들어 몇백만이나 되는 신자들을 부패시키고 다시금 교회를 카타콤으로 밀어 넣고 말 것입니다.”

조선 후기 무렵부터 수 많은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피를 흘렸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서양 제국주의 침략 수단으로 간주되어 돌팔매질을 당했고, 그 후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총칼 앞에서 신앙을 지키다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습니다. 이들 마음에는 증오와 분노보단 사랑과 용서로 가득했습니다. 신앙과 정의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습니다. 고유 신앙이 뿌리 박혀있던 신라에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되는 데는 희생적이었던 이차돈의 순교가 결정적이었다고 하죠. 한 때 기독교 불모지였던 이 땅에 어느덧 개신교와 카톨릭을 합친 기독교인 비율은 전체 인구의 1/4 이상을 상회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곧 닥쳐와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을 실천한 선조들의 정신이 밑거름되어 한국 기독교가 성장한 것입니다.

치셤 신부는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마치고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귀향합니다. 수도원 동기인 옛 친구는 늠름한 풍채와 원숙한 품위를 뽐내는 주교가 되어 그를 맞이합니다. 이 신수 훤한 주교는 절름발이가 된 그의 노력을 영웅적이었다고 치하하나, 사역지에서 36년간 개종시킨 신자 수가 어떤 신부의 5년간 실적에도 못 미쳤다고 다그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치셤 신부는 허례허식을 모두 내려놓고 사랑만을 강조합니다.

“이런 곳에 너무 오래 격리되어 있다 보니 나의 신앙도 세월을 따라 더욱 단순해져서 정화되어 버린 것 같다. 교리에 관한 복잡한 이론은 모두 깨끗이 지워버렸다. 그보다는 근본적인 것-하느님(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 등-을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온 세계의 교회가 서로 미움을 버리고 하나가 되어야 할 시점이 아니겠는가?”

치셤 신부의 이 같은 읊조림은 현대 종교와 기독교가 잃어가는 사랑에 대한 본질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었음에도 한국 교회가 맛을 잃은 소금처럼 교회 내부와 사회에서 잃어가고 있는 ‘예수의 사랑’ 말이죠. 그것이 천국의 열쇠인데도 말입니다.   

며칠 전 혜민 스님은 메리 크리스마스(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고 성탄절을 ‘두 손 모아’ 기념해주셨습니다. 천국의 열쇠는 536페이지에 걸친 두꺼운 소설이기에 삶이 분주해 읽을 여력이 없는 독자들의 12월 밤은 이 기념사가 일루미네이션(조명)의 따뜻함을 대신 전달해 줄 겁니다. “사랑한다면 안아주세요, 성모가 하나뿐인 구세주를 안듯이. 들어주세요. 온 우주에 그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눈을 봐주세요. 언어를 잃은 두 영혼이 대화를 하듯이. 같이 춤을 추세요. 마치 내일이 지구 마지막 날인 것처럼.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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