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게 귀찮은 아빠가 아이와 대화하기

아이들은 말이 많다. 듣는 사람과 관계없이 아이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하루가 모자라 보인다. 쉴 새 없이 떠들고 뒤돌아서 또 떠든다. 소울이, 태이는 내가 본 어떤 아이보다도 말이 많다. 아내인 햇볕도 만만치 않게 말이 많지만 아이들 앞에선 어느새 청중으로 변한다. 

주제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하루하루 본인들이 겪었던 얘기들을 두서없이 펼쳐 놓는다.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그 주제를 금세 따라잡기 어려워져 허투루 듣다 보면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나는 말하는 것이 귀찮다. 말이란 행위가 귀찮기 보다는 말하는 과정에 번거로움을 느낀다. 생각을 정리하고, 알맞은 표현을 찾고,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는 행위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크다. 생각해 보면 사춘기 시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내 유년 시절 누구보다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셨지만, 사춘기 아들과의 대화에는 서투르셨다. 대화가 적었던 만큼, 서로의 개인사에 무지했다. 아버지는 내 친구들의 이름을 잘 모르신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 이름은 아는데, 개인적인 친목 모임으로 이어진 덕분이다. 그러니 내 친구를 안다기 보다, 당신들 친구의 자녀를 안다는 편이 더 맞다. 

소울이가 태어나고 태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도 아버지처럼, 아이들과 서로 무덤덤한 사이가 되지 않을까?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에게 하는 첫 번째 질문은 "오늘은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소리나는 어린이집에 오기 전까지 그 질문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소울이, 태이는 항상 지정된 공간에서 계획된 놀이, 깊은 고민 없이 옆에 있는 동년배의 이름만을 반복하였다. 아이들의 기계적인 대답이 마치 가공된 느낌마저 들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하였는지 나도 매일 듣는 그 이름을 항상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소울이, 태이는 은평으로 이사 온 이후로 대화의 주제가 많이 바뀌게 되었다. (물론 내가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계획에 없었지만 재미있었던 일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재밌던 상황에 함께 하였던 친구, 형, 오빠, 언니, 누나, 동생, 선생님, 혹은 아마(학부모)까지 누가 되었던 이름도 같이 튀어나왔다.

친구의 이름과 에피소드는 항상 콤비처럼 따라오는데, 아이들의 이야기에 '진짜 이름'이 들어가니 대화는 생기가 돌고 나도 바짝 마주 앉아 '진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제일 좋다든가, 누가 제일 멋지다든가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언젠가 더는 아빠에게 얘기해 주지 않는 날이 올까 걱정될 정도로 아이들과의 대화는 나에게 소소한 울림과 기쁨을 준다. 

말하기 귀찮은 아빠와 살아가야 할 소울이, 태이가 가끔은 안쓰럽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본인들의 세상에 함께 있는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들을 내가 기억해 준다면 내가 걱정하던 침묵의 대물림은 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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