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싸울 때 마다 투명해진다 - 은유 / 서해문집

내 인생의 책은 ‘자꾸 바뀐다’. 읽고 너무 설레어 몇 번씩 읽고 하다가도 더 설레는 책이 꼭 나타난다. 학교 다닐 때 술자리에서 몰래 빠져 나와 화장실에서 숨어 읽던 『태백산맥』이 그랬고 영어 학원 간다고 한 시간 일찍 나와 수강 시간 전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그랬다. 새벽에 아이가 깰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만났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지금은 왜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때 안 보면 영 못 볼 것처럼 쥐고 놓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고 다시 읽지도 않았다. 내 인생의 책이라면 덮어도 기억나고 다시 보고 싶고 그런 책일 텐데, 나에겐 읽을 땐 푹 빠졌으나 다시 만나지 않은 책 투성이다. 

몇 년 전, 동네 엄마들과 ‘사소한 책마실’이라는 책모임을 시작했다. 일하며 아이를 키우고 가족 뒷바라지에 지친 엄마들이 모인다. 함께 책을 정하고 낭독하고 책을 이야기하고 삶을 나눈다. 한 달에 두 번 만나니 책을 읽는 속도가 무척 느리다. 게다가 이런 저런 일들로 못 나오는 엄마들이 많다. 카톡방에는 무려 14명이 있는데 모임일이 되면 4~5명도 나오기 힘들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책을 읽는 모임이 있으니 함께 책을 고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기쁘다. 

이곳에서도 내 인생의 책은 계속 바뀐다. 책모임을 하면서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았다. 나의 처지는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직장을 다니고 사람을 만나면서 계속 바뀌었다. 그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대하는 나의 ‘상태’는 계속 ‘성장’한다.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도 이해되고 나는 그때 어떻게 그런 말(생각)을 했을까 싶은 부끄러운 일 투성이다. 

처음엔 육아 관련 서적을 읽다가 경제학 서적에서 심리학 서적으로 옮겨가고 있는 책마실은 한 권은 느리게 읽고 대신 그 시간 동안 ‘돌려 읽기’를 한다. 책 주인이 추천하면 모임원들이 희망자에 한해 책을 돌려 읽는다. 연필로 줄을 긋기도 하고 문장에 씌여진 다른 사람의 코멘트를 읽기도 한다. 빌린 책이지만 빌린 책이 아니다. 여럿이 오랜 시간 함께 책을 읽는 둣한 느낌이 든다. 올해는 『공부중독』,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한다』, 『82년생 김지영』 등의 책을 함께 읽었다. 

책마실에서 만난 책이 은유 작가의 『싸울 때 마다 투명해진다』 이다.

마음에 남지 않고 스치고 지나갈까 아까워서 문장 하나 하나, 꾹꾹 눌러가며 읽었다. 일상에서 울컥하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 서러웠던 기억들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실제 더 큰 위안은 다음 순번 엄마가 책을 받자마자 연신내 중고 서점 한 귀퉁이에서 눈이 팅팅 부어 집에 가서 마저 빨리 읽어야겠다고 말한 그 순간.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더 설레는 책에 마음을 뺐겼던 나를 이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췌 언제까지 빠져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요즘 내 인생의 책은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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