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가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로써 국내에 등록된 239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36명으로 줄어들었다. 위안부 생존자들이 세상을 뜰 때마다 위안부문제는 다시 뉴스에 등장하곤 한다. 광복 72주년, 전국에서 소녀상 건립 열풍이 한창이고 최근에는 세계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 소녀상이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 은평에서도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다. 은평주민이기도 하며, 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와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주>

 

1944년 중국 원난성 쑹산 위안소에서 탈출한 위안부 사진. 발굴 경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평양에 거주하던 고 박영심씨(2006년 사망)가 사진 속 만삭의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사진'으로 입증된 첫 사례가 됐다.

-전국에 소녀상이 90개 정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늘어나는 건데 이런 소녀상 건립 열풍을 어떻게 보는지?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을 풀고 일본이 사죄하게 만드는 건 중요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소녀상을 세우는 목적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인데 여기서 해결이란 일본정부의 사죄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밖에 우리가 더 생각할 것은 없는지 일본정부가 사죄를 하면 그래서 진상규명과 배상이 이루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 소녀상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분들의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지만 과연 위안부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 지는 의문이 든다. 위안부 문제는 사실 가족문제이기도 하고 여성취업문제이기도 하고 성매매, 성폭력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얘기까지 해야 위안부 문제해결에 다가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려면 어떤 얘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은가?

우선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집을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정신대연구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나온 책이 8권 있고 그 외 대구에서 통영에서 전북에서 꾸준히 증언집이 발행되고 있다. 

일단 할머니들이 어떤 피해를 당했고 어떤 점이 고통스러웠는지 이야기를 듣는 거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 그밖에 우리가 일상에서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건 어떤 게 있는지 생각하면 좋겠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사건 속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들어보자. 증언집을 한 권만 읽어봐도 마음이 복잡해 질 거다.

동아시아 전체로 볼 때 위안부 피해자가 20만 명 정도인데 남북한 합쳐서 드러난 피해자가 오백 명 정도다. 오백 명 피해자들 이야기만 분석해도 그 피해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걸 알 수 있다. 때문에 어떤 피해를 어떻게 입었는지 밝히는 진상규명이 먼저고 위안부 관련한 최소한의 연구성과나 정리된 자료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위안부 문제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여성문제라는 건 무엇인가?

박정애 교수

강제 동원된 징병피해자는 몇 백 만 명인데 위안부 피해자로 나서는 사람은 왜 239명뿐일까? 우리는 그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혐오문제와 위안부 문제를 떼어 놓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저출산문제가 심각하다면서도 맘충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노키즈존을 둔다. 우리사회가 평화문제, 인권문제, 성폭력문제 등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전히 소녀를 국가나 남성이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를 유지하는 여성상을 만들기 위해 미리 보호하고 그 소녀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경험의 기회를 주지 않는 거, 이거는 아니다. 이런 게 여성들의 주체적인 삶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성기로 보고 그걸 국가가 나서서 제도로 만든 게 위안부 문제다. 우리는 이 문제는 매끄럽게 풀 필요가 없다. 문제가 되는 지점을 계속 건드리면서 우리사회에 계속 고민을 던져야 한다.

-위안부 피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위안소라는 말은 1910년대부터 보이는데 지금의 휴게소 개념이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이 일어난 이후 휴게소와 성적시설의 의미가 혼재되어 쓰였는데 중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체계적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특수위안시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매매공간이나 성적위안시설이나 그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을 노골적으로 쓰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그게 불리한 요소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안부 관련 자료 찾기가 매우 어렵다. 

위안소를 다녔던 일본군 병사들은 위안부라는 말을 잘 모른다. 대신 ‘삐’라는 말로 쓴다. ‘삐’는 중국속어로 성기를 비하해서 쓰는 말이다. 병사들에게 위안부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성기일 뿐이었다. 조센삐, 니혼삐 이런 말을 썼다.

-위안부 피해자 규모는 어느 정도 되는지?

한국인 피해자로 등록된 분은 239명이고 남북한 합쳐서 500여명 정도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위안부 피해자가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이다.  

일본군에서 어떤 범위까지 군이 관리하는 성적위안시설로 두었는가는 연구자별로 다르다. 일본의 우익학자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인 공창말고는 다 개인영업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게 말이 안되는 게 전시상황에서 어떻게 군의 허락 없이 이동하고 점령지에서 영업을 할 수 있나? 근데 이런 일본의 우익주장대로 일본인 공창만 봤을 때도 그 수가 2만 명이다. 피해자 수가 적든 많든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가 있음을 인지한다면 일본은 가해책임이 있다.

당시 일본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니구이치’라는 말이 통용됐다. ‘니구이치’는 군인 29명당 1명의 위안부를 책정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전체 일본군 규모가 250만 명에서 300만 명 정도여서 역추산해 보니 8만 명에서 20만 명의 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점령지인 중국에서 일으킨 일시적인 강간피해자까지 포함시키는데 그 수가 20만 명이어서 총 피해자를 대략 40만 명이상으로 보고 있다. 

중국 산시성은 일본군과 중국군이 엎치락뒤치락하던 곳인데 일본군이 점령했을 때 보름에서 한 달 정도 있으면서 여성들을 폭력적으로 끌고 가서 강간하고 민가를 빼앗아 위안소로 사용했다. 전시상황에서 어떤 특정한 목적을 얻기 위해 체계적으로 강간을 행한 것에 대해 위안부로 볼 거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피해자 양상이 다양한데 오직 한 가지 소녀상으로 대변되는 이야기만 있다.

박정애 교수

위안부 동원과정을 상상하면 보통 영화 ‘귀향’을 생각한다. 가난하지만 화목했던 가정에서 끌려가는 어린 소녀를 떠올린다. 가난한데 가정이 화목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는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로 가서 고생을 하거나 가난을 피해 집을 나오고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들은 전쟁이 나고 위안부 수요가 늘어 브로커들이 활발히 활동할 때 쉽게 표적이 된 사람들이다. 결혼하는 게 너무 싫었던 소녀에게 브로커가 접근해 여자가 결혼 안하고도 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데려가고, 아버지가 재취자리에 시집보내려고 해 거부하다 눈치 보며 공장에 취업했더니 유곽이었고, 시집살이 너무 힘들어 친정 돌아왔지만 받아주지 않아 여기저기 떠돌다 끌려가고 그 피해양상이 피해자 수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 

미군 위안부도 충분히 이야기되어야 한다. 일본군위안부하고 미군위안부하고는 인식차이가 엄청나다. 한국전쟁 때는 한국군이 미군에게 기지촌을 형성시켜줬다. 일제강점기에는 위안부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대신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라고 표현하는 1960년대, 70년대 자료가 많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경험했던 이들이 해방된 한국에서 위안부를 만들었다. 군대를 효율성있게 운영해야 한다고 일본군에게 배운 거다. 

-한일관계에서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한일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동아시아 전 지역에서 일으킨 전쟁문제다. 일본은 일본인 위안부와 해결할 문제가 있고 조선인 위안부하고 해결할 문제가 있고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위안부와도 해결할 문제가 있다. 

한국은 한국피해자들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면서 요구할 건 요구하고 전쟁피해지역 여성과 연대하면서 이야기할 부분이 있는데 지금은 한일관계로만 좁혀서 이해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을 다시 끌어내는 방식이 아닌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상태에서 금방 논의들이 단합되는 게 너무 불편하다. 진실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보다 프레임 싸움만 한다. 소녀상도 한편으로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동아시아에 저지른 전쟁에 대한 이야기하고 우리 사회의 인권문제, 성폭력문제 등이 충분히 논의된다면 그리고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여성혐오문제를 성찰할 수 있다면 전국에 소녀상이 만들어져도 괜찮다. 

논의가 풍부해지고 문제의식이 다양해지면 전국에서 소녀상만 만들지는 않을 거다. 소녀상에는 고민과 성찰 등의 풍부한 내용이 담겨야 하는데 역사적 상상력은 빈곤해 보이고 반일문제에 기대서 우리안의 불편한 문제들을 외면하는 모습은 많이 아쉬운 대목이다. 

-꼭 전하고 싶은 말은?

근대화는 좋은 거, 달성해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을 생각해보자. 근대의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의 결정판이 위안부문제다. 제국주의, 전쟁, 계급차별, 식민지차별, 젠더차별, 가부장제 이런 문제가 다 들어있는 게 위안부문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려면 당시 정치적인 흐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봐야하고 사회구조, 교육제도, 가족제도, 국가권력의 성격 등을 살펴보려고 노력해야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239명이 전쟁터에서 겪은 문제가 아니다.

여러 피해자들의 생애가 응축된 소녀상을 한 명 한 명 구체적인 여성들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 때 과거의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미래사회를 그려나갈 수 있음을 꼭 기억하면 좋겠다. 

<박정애 교수는 한국근대여성사학을 전공하고 1999년부터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운동 및 연구에 관계했다. 과거의 고통이 오늘날에도 지속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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