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를 혁명의 본산으로 바꾼 데카브리스트들의 흔적 발콘스키 박물관

올해에도 시베리아에 갔습니다. 2010년부터 해마다 다녀온 여정이니 벌써 열 번째입니다.

서삼독(書三讀)이라고 했지요. 책을 읽을 땐 텍스트(text)를 먼저 읽고 필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독서의 완성 이라는 겁니다. 기행(紀行)이란 말도 행자의 발걸음에 실마리를 잡는다는 뜻이니까 독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베리아에 처음 갔을 때는 광활한 대지와 바다 같은 바이칼 호수만 보이더니 점차 그들의 역사와 삶의 방식이 보이고 함께 동행 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몇 번의 경험이 더 쌓이니 횡단열차를 타고 가는 나의 모습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1790년 비엔나 산 피라미달 포르테 피아노, 저 피아노 소리는 농노들의 노동속에 스며들어 어떤 꽃으로 피어났을까.

그때 즈음에야 시베리아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 했는데 먼 여행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내가 참 초라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습니다. 가슴에 담고 왔던 대륙을 풀어내기에 나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던 거지요. 관해난수(觀海難水)라고 했던가요. 저잣거리에서 빌어먹어도 재주는 재주라고 열 번이나 되는 대륙기행에도 이력이 붙어 시베리아를 얘기하는 자리면 괜히 말석에라도 앉고 싶다가도 어떨 땐 내 발이 기억 하는 일을 말로 푼다는 게 하찮아질 때도 있어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번 기행에서는 무엇을 남길까를 늘 궁리하긴 합니다. 

발콘스키(세르게이 그레고리예비치 발콘스키, 1788-1865)를 다시 만난 게 올해입니다. 다시 만났다고 표현하는게 맞습니다. 이전에 내가 알던 그는 1825년 12월 14일. 러시아 제정을 뒤엎기 위해  죽음을 결의 했던 3000여 반란군의 수장. 이른바 데카브리스트(12월당)로 이름 붙여진 러시아 최초의 혁명군이었습니다.  시베리아에 유배된 데카브리스트들 가운데 113명이 지주 귀족신분이었고 공작이 여덟 백작이 하나 그리고 남작이 네명이었으니 데카브리스트 혁명은 우리역사로 치면 우당 이회영과 석주 이상용이 그 많던 가산을 정리하고 노비들을 해방시킨 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먼 만주행을 택했던 결의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입니다. 

그가 아내 마리아 볼콘스카야와 함께 30여년의 유배생활을 보냈던 일과 이르쿠츠크 인근의 네르친스크의 광산에서 10여년이상을 중노동에 시달렸다는 사실과 그의 발목에는 약 12~13kg의 족쇄가 채워졌는데 아내 마리아 볼콘스카야가 그를 찾아 광산에 왔을 때 제일 먼저 한일은 그 족쇄에 입을 맞추는 일이었다는 것도 기억을 했으니 그에 대한 공부가 덜되지는 않았던 올해에도 지나간 흔적을 되짚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발콘스키 박물관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런데 비참한 농노들의 삶에 정 반대되는 고풍스런 유물들을 다시 볼 때쯤 가난한자의 인문학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을 정상적 시민의 지위에 올려놓은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가슴아픈 질문이 생각 났습니다.

“사람들은 왜 가난할까요?” 그의 질문에 담담하게 그녀가 대답했다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는 정신적 삶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 이예요”.정신적 삶이 종교일거라고 짐작한 그가 확인차 다시 물었다 “정신적 삶이란게 무엇 입니까?” .“극장과 강연 박물관 연주회 같은 거죠”

희망의 인문학2006.이매진

1790년 비엔나 산 피라미달 포르테 피아노, 저 피아노 소리는 농노들의 노동속에 스며들어 어떤 꽃으로 피어났을까.

세계에서 3대밖에 없다는 가장 오래된 포르테 피아노. 옛 여인의 손때가 잔뜩 묻어있는 저 바이올린. 품위 있는 옷들과 그림과 시편들과 농노들과 함께한 마당음악회. 거기서 나온 문화의 혼이 노동에 지친 농노들에게 정신적 삶이되고 위안이 되고 새 세상을 꿈꾸는 동력이 되어 급기야 유배자의 도시 이르쿠츠크는 미하일 바쿠닌,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 우리 귀에도 너무 익숙한 세기의 혁명가들의 반란의 땅이 되고 볼셰비키 혁명의 본산이 되고 지금은 “시베리아의 파리”가 되어있는 것 아닌가.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서포의 남해나 고산의 보길도는 은둔자의 섬이며 다산의 강진이나 추사의 제주도 또한 언제나 중앙권력을 향한 기착지였을 뿐 변방으로부터 솟아난 혁명의 출발지가 가난한 민중의 세상을 위한 사상의 종착지가 되지 못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보단 숱한 변방의 삶이 있었음에도 변방의 사상이 세계의 중심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이 부끄러웠습니다. 정여립의 죽도(竹島)가 그리워 졌습니다. 변방의 녹슨 칼로 임금의 곤룡포를 찢으려 했던 사람. 역사속의 무모한 비명 횡사자였으나 그조차 부끄럽지 않았던 그의 흔적위에 그가 죽은 뒤 200년 뒤에야 태어날 러시아의 혁명가이야기를 들려주며 꽃 한송이 얹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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