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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2주년, 은평구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 은평시민신문
  • 승인 2017.08.2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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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72주년을 맞이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채 언제 독립이 될지 모르는 암울한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인생을 걸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독립을 열망했던 마음만은 여전히 뜨겁게 전해지고 있다. 은평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80가구 이상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16년 구산동도서관마을 마을자료실에서 진행한 <은평구독립운동가 알리기>를 지면으로 옮기며 자주독립을 위해 피흘렸던 시절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승달 애국지사, 이종렬 애국지사, 설철수 애국지사, 정재용 애국지사, 김봉국 애국지사, 부춘화 애국지사

■김창오(1860.5.7~1908.2.5)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1907년 정미7조약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의병장 박기섭의 의진에 입대하였다. 약 150명의 부대원을 거느리고 연안읍을 습격하여 해주 일군 수비대에서 파견되어 온 하야 소대와 2시간에 걸쳐 완강한 격전을 벌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전투는 군대해산 후 황해도에서 전개된 의병 투쟁 가운데 선구적 역할을 한 가장 큰 항쟁으로 이후 황해도 의병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배천 국근리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갈현동에 손자녀가 살고 있다.  

■최승달(1888.6.24~1967.5.11)

황해도 옹진 출생으로 1921년 4월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을 선동하여 일본주재 미국대사관을 폭파함으로써 일본과 미국 사이에 분쟁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선생은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와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12월 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5년 11월과 1942년 9월에도 독립운동의 혐의로 예비검속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갈현동에 자제분이 살고 있다. 

■한대홍(1901.12.18~미상)

평남 평원에서 태어나 1919년 중국 봉천성에서 군자금 모집과 친일관리 처단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대한독립광한단을 조직하여 1920년 10월부터 최제균과 함께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과 일본순사 처단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구산동에 외손자가 살고 있다.

■최익환(1889.2.12~1959.7.25)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독립달성을 위해 대동단을 결성했다. 대동단은 당시 사회 각층을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국적 조직을 목표로 하고 활발한 조직 및 선전활동을 펴나갔다. 이때 선생은 동단의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동단 발행의 각종 인쇄물 등을 작성·배포하였는데 이 일로 6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녹번동에 자제분이 살고 있다.

■정재용(1886.11.6~1976.12.31)

황해 해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열릴 예정이던 독립선언식에 5천명 이상의 학생과 상당수의 시민들도 참석하였는데 갑자기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장소를 변경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자 경신중학교 졸업생인 정재용 선생이 용감하게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수천의 학생·시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할 수 있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후 선생은 이해 8월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2년 6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에는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 활동에 참여하여 조국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녹번동에  손자녀분이 살고 있다.

■이명봉(1864. 2.12 ~ 미상)

1919년 3월 3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4월 2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정평 제일예수교 내 기독청년회에서 설립한 성경연구과에서 수학하는 등의 종교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조동에 손자녀분이 살고 있다. 

■도무환(1888.6.6~1919.6.15)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나 1919년 4월 2일 벽진면 해평동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성주읍 장날 시위에서 일제의 야만적인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분개하여 해평동에서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일제에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고 출옥하였으나 가혹한 태형의 후유증으로 이튿날인 6월 5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불광동에 외손자분이 살고 있다.  

■홍영기(1918.12. 3 ~ 미상)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1940년 정칙영어학교 재학 중 동아연맹 한국학생 좌담회에서 유학생들을 만나 우리 민족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협의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할 비밀결사 '우리들'을 조직하였다. 

선생은 독립 달성을 위한 1단계로 역사·경제·민족정치·사회학·철학 등 각 분야별로 민족운동의 지도원리를 연구하기로 협의·결정하고 귀국하여 전남 담양의 회원 박석우의 집에서 회원들과 함께 연구 상황을 상호 보고하는 등 독립정신 앙양에 노력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불광동에 자제분이 살고 있다. 

■ 심용철(1914.10.23 ~ 2001.4.21.)

함북 길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 등 무정부주의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권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는 현실을 타파하고 상호부조에 의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무정부주의를 주장하고 일본 제국주의 타도에 나섰다. 심용철 선생은 1931년 11월 별동조직으로 상해에 흑색공포단을 결성하여 일제 고관 암살, 일제 관공서 파괴, 부일배 처단 등 구체적인 항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흑색공포단은 일본영사관의 밀정인 이종홍, 상해 조선인거류민회의 고문으로 친일파인 이용로를 사살 응징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동지들이 체포되고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심용철 선생님은 중국 적지구에서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군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수색동에 자제분이 살고 있다.

■ 이종렬(1924.11.29 ~ 현재)

▲이종렬 애국지사가 지난 8월 10일 신사2동 주민센터 대강당에서 열린 광복 72주년 기념 애국지사 초청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1945년 1월, 중국 호북성, 신점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유격부대에서 유격전과 적 정보수집 활동 등을 하였다. 그 후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입되어 전방공작원으로서 대적 정보활동 및 한·중 합동작전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님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신사동에 생존해 계신다. 

■김용중(1898.3.2~1975.9.6)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한 선생은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며 여러 직책과 임무를 맡았다. 1942년 3월에는 뉴욕에서 개최된 26개국 동맹원탁회의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1943년에는 한국문제연구소를 창립하고 『한국의 소리』를 간행하며 국제적으로 한국의 실상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렸다.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광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하였고 광복 후에는 한국의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신사동에 외손자분이 살고 있다.

■설철수(1914. 6.25 ~ 1981. 8.26)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1934년 경남 창원군 소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학생들과 함께 민족주의사상을 연구하면서 항일독립의식을 키웠다. 학교를 졸업한 후 삼동공립보통학교에 선생님으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알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함을 역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가르쳤다. 후에 통영제일공립심상소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다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38년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출판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역촌동에 자제분이 살고 있다. 

■부춘화(1908.4.6~1995.2.24)

1908년 출생으로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보통학교 야학부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제주도 해녀조합 산하 조직인 구좌면 해녀조합 대표로 선임되어 해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해녀조합이 하도리 해녀들이 수확한 감태와 전복 값을 터무니없이 강제로 싸게 매기려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해녀들은 항의하였으나 시정되지 않자 1931년 6월부터 직접 투쟁에 들어갔다. 지역별 해녀들과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해녀조합에 대한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확정하고 1932년 1월 7일 하도리 해녀 300명이 세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1월 16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목포유치장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요죄로 집행유예 6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역촌동에 자제분이 살고 있다. 

■김봉국(1890.9.20~1932.3.3)

평남 성천 출생으로 1919년 성천의 3·1독립운동을 천도교 간부 등과 협의하여 주동하였다. 이 지역의 3·1독립운동은 5만 2천명의 군중이 동원되었고 사망자 36명, 부상자 60명, 피검자 5백 35명을 낸 커다란 민족적 시위운동이었다. 1922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24년에는 일제의 언론 탄압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으며 이때 위원으로서 선출되어 활동하던 중 봉천에서 체포되어 1928년 10월 평양복심법원에서 5년 징역이 확정되어 1931년 12월까지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으나 옥고로 인한 병으로 1932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응암동에 손자녀분이 살고 있다.  

■ 신동송(1870.3.26~1919.3.19)

1870년 출생으로 1919년 3월 19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시위하다가 일군경의 무차별한 발포로 인하여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습니다. 증산동에 손자녀분이 살고 있다.

■ 유찬옥(1916.10.4~1946.5.16)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나주 농업보습학교 학생으로 동교 학생들과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당시 수감된 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1월 26일 학생들과 만나 약 2,000부의 격문을 인쇄하여 다음날인 27일, 시위운동을 하도록 권유하여 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보통학교 학생 130명이 항일시위를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수감 당시 의열투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장진홍이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한 사건과 관련하여 강력히 항의하다가 징역 8월을 더 받았다. 출옥 후에는 1932년부터 나주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1932월 11월 검거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증산동에 자제분이 살고 있다.

■ 김두찬(1919.1.24~2011.12.30)

평남 강동에서 태어나 중학교 재학중인 1936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연행되어 구류처분을 받았으며 1938년에는 동지 김길순·박병조 등 6명과 함께 항일결사를 조직했다. 그 후 1939년에 동경으로 유학한 후 1943년에 일본군의 원동력 구실을 하던 겸이포제련소의 용광로를 폭파하는 계획을 세우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1943년 11월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으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습니다. 진관동에 사모님이 살고 있다.

자료출처: 국가보훈처, 구산동도서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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