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이나 북촌 골목을 다니다 보면 꼭 연인 인듯한 남녀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날 더운데 뭔 짓이냐 싶다가 금새 그 연인들의 웃음 따라 나도 웃게 됩니다. “참 좋을 때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요.  지하철에서 서있는데 어린 아이가 엄마 옷깃을 붙잡고 칭얼거립니다. 가만 들어보니 “엄마 나 게임기 사줄 거야 말거야” 가만 보고 있으니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짜증인 듯 애정인 듯 아이의 이마를 콩 찢는 젊은 엄마의 장난기 담은 손짓도 꽤나 정감 있어 보입니다. 장마가 지나면서 골목마다 능소화가 한창입니다. 담장에 펼쳐진 꽃을 보는 것도 아련하지만 저 위 전봇대 끝에까지 올라가 피어있는 능소화를 보면 또 절로 웃음이 나오게 됩니다 . “나도 못 올라가는 그 높은 곳, 거기까지 올라가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니”. 

“앞 못 보는 아들을 둔 늙은 어미가 부처님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다가 등을 걸어 달라고 돈 몇 천원 스님 손에 쥐어주며 간절히 부탁하는 모습을 초파일날 조계사 앞을 지나가던 맹인 수녀가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다 가슴에 따뜻한 촛불 하나 밝히고 길 떠나는 저녁 – 길떠나는 저녁. 원제 맹인수녀, 정호승 시 이지상 노래-

동네에서 버스를 타면 자폐장애를 가진 어린 아이 손을 잡고 시내로 나가는 엄마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명을 표현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소리를 지르는 아이의 입에 자신의 볼을 대어 막으며 “우리아기 착하지 여기서는 크게 떠들면 안돼요” 지그시 아이의 어깨를 끌어안는 엄마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엄마의 눈빛에는 북미 인디언들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침묵”이 담겨 있습니다. 부산스러운 아이를 대신해 주위를 걱정하는 연민의 지혜입니다. 철저한 자기통제로 만들어낸 용기이고 인내와 끈기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침묵의 열매는 위엄이고 경외(敬畏)라던 수우족 출신 북미 인디언 오히예사(1859-1939)의 말을 떠올리면 그 버스 안에서의 침묵의 모성은 “성스러운 신비”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의 목소리가 커지고 급기야 울음이 터져 버스안의 사람들이 흘낏 눈치를 줄 때 쯤 되면 외려 내가 그 아이보다 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어머니 아이의 큰소리도 울음소리도 다 괜찮습니다. 더욱이 아이를 인내하고 주변을 두려워하는 당신의 모성은 담장의 높은 곳까지 올라가 꽃 한 송이 피우는 능소화 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아이는 당연히 능소화 꽃 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하늘을 가장 먼저 바라보는 여린 새순입니다. 같은 넝쿨에서 햇살을 가장 먼저 받고 비도 가장 먼저 맞이해야할 존재입니다. 여기 버스안의 사람들은 모두 동네 사람들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아픔 속에 기꺼이 들어가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상상을 하루에도 몇 번쯤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아이가 넝쿨을 하늘로 이끄는 새순이고 어머니가 그 아래 핀 꽃이라면 우리는 줄기이고 잎이고 그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땅의 양분을 흡수하는 뿌리일 것입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고 그리고 웃어 주십시오.”

당연히 노래는 하지 않았고 다만 이런 상상을 하는 사이 아이의 울음은 그치고 누구하나 아이의 울음을 탓하지 않으며 버스는 무악재 고개를 넘어 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 이다. 그보다 더 먼 여행은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다시 새겨 봅니다. 세상을 좀 더 밝게 하기 위한 무수한 발걸음들이 분주합니다. 그 발걸음의 근간이 버스안의 모성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아보면 싱긋 웃음 나오는 일 많은 착한 하루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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