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의 북한산 큰 숲에서

창의성은 민주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억압적 분위기, 한 쪽의 시선만 강요하는 문화, 양면성 대신에 한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만드는 교육 시스템이 창의성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서로 반대되거나 다른 것들이 결합하면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서로 다른 생각, 심지어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 그것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능력이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지성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칙센트미하이도 ‘Creativity’에서 동일한 취지의 말을 했다. “양면성은 우리 안에 모두 내재하지만 보통 한쪽으로 기울어지도록 훈련을 받는다. 양면성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가 ‘창의적’이라고 부르는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양면성의 핵심은 한 쪽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지 않고 양 쪽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타인만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객관적으로 본다. 창의적인 사람은 나와 남의 경계에 설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을 통합하는데 유능하다. 동시에 여성성과 남성성 중에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다.


“조직에서 비극이 생기는 이유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협력과 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목소리를 거부하고 패거리들 끼리 
동종교배(同種交配)로 치달린다.”

창의적인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에 서서 자신이 모르는 것에 민감하게 촉을 세운다. 무지(모른다는 것)에 민감하다는 건 무지(모르는 것)를 의식으로 끄집어내서 질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창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이종교배(조화)를 이루지만 동종교배(동화)를 하지 않으며 소인은 패거리 간에 동종교배(동화)를 하지만 이종교배(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올바른 원칙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패거리 간에 모여 동종교배(동화)를 하지 않고,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이종교배(조화)를 할 줄 모른다. 

예술이든 조직이든 자연의 생태계든 사회의 생태계든 동종교배의 지속은 열등인자를 낳게 되고, 결국 매너리즘이 작동하여 종의 단종이라는 위기로 이어진다. 조직에서 비극이 생기는 이유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협력과 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목소리를 거부하고 패거리들 끼리 동종교배(同種交配)로 치달린다. 창조적 아이디어는 다양함과 다름에서 나온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과 다른 경험이 필요하다. 

경계에 서는 것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창의적인 사람은 지와 무지의 경계에 선다. 우리는 ‘서로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하는’유전자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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