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사람이 사는 마을 1]

집 앞 담벼락에 아주 오래된 낙서가 있습니다. "이 새봄 언니 천재" 삐뚤빼뚤 하얀 백묵으로 쓴 어린아이의 글씨입니다. 큰아이 새봄이가 이 골목에 이사 와서 먼저 놀던 동생뻘 되는 아이를 가르친답시고 이것저것 재미있게 데리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글씨를 쓴 아이는 벌써 이사를 갔지만 동네 언니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남겨준 것이지요. 어른 중에서 누군가가 지워 버릴 듯도 하지만 여전히 매년 봄이면 가장 눈에 띄는 낙서입니다. 새봄이가 일곱 살에 이 글귀를 선물 받고 스물 셋이니 열일곱 해나 이 좁은 골목길에 살았습니다. 


능력이 좀 되는 사람들은 다한다는 다운계약서니 위장전입이니 하는 말은 써보지도 못하고 꼬박 열일곱 해. 그렇게 살다보니 대충 이 계절에 이 골목을 밝혀주는 꽃들의 종류와 개수도 어림잡을 수 있습니다. 봄바람에 네댓 그루 있는 목련이 떨어진 지는 좀 됐고 지금은 딱 한그루 있는 라일락의 향기가 좋습니다. 


이팝나무는 골목 끝집 마당에 있는데 가지가 담장을 넘어와 꽃 피우면 절로 웃음 나오게 하지요. 좀 더 여름으로 가면 큰길가 허름한 담장으로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필겁니다. 그것도 미리 생각해 두면 싱긋 웃음을 당겨서 웃을 수 있습니다 내가 대뜸 골목 풍경을 이야기 하는 이유가 사실 따로 있긴 합니다. 나의 마음이 몹시 상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 남자는 설거지 담당이라는 하늘의 명을 여성이 받았다고 설레발치는데 "하필 우리 집은 그 존엄한 명을 남자에게 내렸는가" 싶어 은근히 골이 난 것도 있습니다. 스무 살 혈기어린 나이에 하필 나는 맘에 품은 여인네 말 걸기도 손끝하나 닿기도 어려워 얼굴 붉히며 괜히 그녀의 주변만 맴돌았었나 싶은데 그 혈기를 동물에게나 쓴다는 약을 여인네에게 먹여 자빠트릴 궁리에 몰아주었던 비열한 청춘이 있었고 그런 범죄자들이 소위 대한민국의 엘리트라는 딱지를 달고 나름 한 가닥 한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부아가 치밀기도 하구요. 


해서 정권 교체니 장미 대선이니 새날의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참 웃을 일 없는 세상을 탓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괴테의 어록을 나름 마음속에 새겨둔 결과지요.


"동물에게나 쓴다는 약을 여인네에게 먹여 자빠트릴 궁리에 

몰아주었던 비열한 청춘이 있었고 그런 범죄자들이 소위 대한민국의 

엘리트라는 딱지를 달고 나름 한 가닥 한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며칠 전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경계선이 있는 두만강 철교위에서 허망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연간 40조원을 오직 적을 경계하기 위해 쓰고도 모자라 늘 안보라는 말 말고는 다른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나라의 시민인 내가 그리 부끄러울 수 없었습니다. 


대륙에 흩뿌려진 꽃씨만큼의 지뢰밭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면 곧바로 반체제 인사가 되는 나의 땅은 섬입니다. 그러나 초소 하나 없이 보초병사 한명 없이 총 한 자루 없이 낡은 철조망과 표지석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평화로웠던 경계가 있었고 그 표지석 위로 바람이 불다 방향을 틀어도 나비가 날고 잠자리 철새 떼 한 무리 돌고 돌아도 누구하나 총구 들이대지 않는 곳. 그렇게 평화였던 국경이 있었습니다. 


무기를 더 쌓고 쌓아야 평화가 온다는 내 땅의 신념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울분에 차올라 소주 한 병 나발 불다 "저기가 고향이여 핏덩이로 어미 등에 업혀 나와 70년도 넘게 가보지 못한 내 고향이여" 한숨 쉬는 노인을 떠올리면 저 두만강 철교위의 언덕위에 무릎 꿇고 통곡하고 싶었던 그날을 보내며 만취했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보다 더 취한 붉은 달빛이 떠오르는 새벽 바닷가에선 더 없이 서러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의 노래는 파도소리에 묻혔다가 달이 떠올랐던 곳에서 다시 거대한 태양으로 떠올랐습니다. 부활절 아침이었습니다. 


3년 전 세월호를 싣고 간 바다가 있던 그날 이었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A.J.MUSTER-" 이 말을 곱씹으며 버스 안에서 부활을 소망하는 기도를 드렸고 나는 다시 평화를 살기위해 반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서북청년단의 환생을 보는듯한 극우세력들의 패륜적 언사가 다시 이 땅을 뒤덮고 있는 지금 그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나는 어떻게 하면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가 큰 고민입니다. 아~하면 어~하고 맞장구친다고 대선 후보들의 토론만으로도 국민을 지배할 왕이 될 사람과 국민을 모시는 종이 될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나는 이렇게도 쉬운데 왜 사람들은 구별을 못할까 허망하기도 합니다. 


대륙은 꿈입니다. 70여년 넘게 시달리는 지겨운 색깔론을 끊는 일도, 꼭 그만큼의 분단의 세월도 또 그만큼 살아왔던 섬나라의 질곡도 오직 대륙을 지향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습니다. 60여 년 전 죽산 조봉암도 외쳐댔던 평화통일, 남북화해의 지극히 당연한 비전을 명색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는 TV 토론을 보면서 나는 종종 괴물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저녁 밥 때가 다가옵니다. 시장가는 길 골목 끝에 핀 라일락 향기를 오늘은 더 깊이 마셔야겠습니다. 어느 집 담장을 넘어오는 구수한 찌개 냄새가 나면 오늘 저녁 메뉴는 그것으로 정하겠습니다. 나의 절망이 조금 더 깊다면 아직 피지 않은 능소화 꽃망울을 어루만져 보겠습니다. 골목이 있어 다행입니다.  


이지상/ 가수 겸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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